퀴즈 하나. 음반 시장은 K팝 아이돌 천하일까. 이젠 달라졌다. 23일 카카오엔터테인먼트 등 13개 음반 유통사의 판매량을 집계하는 써클차트에 따르면, 트로트 가수 이찬원은 지난달 20일 낸 앨범 '원'으로 2월 음반 판매량 1위를 차지했다. 8일 동안 총 56만 장을 팔아치웠다. K팝 간판인 세븐틴 멤버 승관, 호시, 도겸이 따로 꾸린 프로젝트팀 부석순이 지난달 6일 낸 싱글 앨범 '세컨드 윈드'로 같은 달 약 50만 장(2위)의 판매고를 기록한 것보다 높은 순위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도 막강한 팬덤을 거느린 K팝 아이돌을 제치고 트로트 가수가 음반 판매 1위에 오르는 일은 이례적이다. 1, 2월 음반 판매량을 모두 확인해봤더니 이찬원 음반은 샤이니 키(7만 장), 슈퍼주니어 예성(6만 장), 뉴이스트 황민현(5만 장), 갓세븐 진영(4만 장) 등 K팝 아이돌 신작보다 최대 14배 이상 많이 팔린 것으로 조사됐다. 트로트 가수가 음반 시장의 새로운 아이돌로 급부상한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K팝 일변도였던 음반 시장에서의 이런 지각 변동은 지난해부터 감지되기 시작했다. 임영웅과 김호중, 영탁 등 트로트 가수들의 음반 판매량은 2022년 총 250만 장(톱50 기준)을 넘어섰다. 트로트 가수들의 연간 음반 판매량이 150만 장을 넘기기는 써클차트가 2010년부터 음반 판매량을 집계한 이래 처음. 음원 다운로드 시장의 판세는 K팝에서 트로트로 확 기울었다. 지난해 연간 음원 다운로드 차트 톱5는 모두 임영웅의 노래 차지였다. K팝은 단 한 곡도 들지 못했다.
팬덤 중심인 음반 및 음원 다운로드 시장에서 트로트 가수가 이처럼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은 트로트 열성 소비층이 최근 폭증했다는 방증이다. 트로트에 문턱이 높았던 음원 스트리밍에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본보가 지니뮤직에 의뢰해 최근 5년간 '월간 차트 톱100'에서 트로트의 진입 횟수를 조사해 본 결과, 2017년 0건에서 지난해 41건으로 급등했다. 같은 기간 전체 가요 스트리밍 횟수 중 트로트 곡 비율은 8배 증가했다. 말 그대로 '트로트 전성시대'다.
트로트는 1990년대 이후 한동안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트로트는 치유와 위로"라는 송가인의 말처럼 코로나 팬데믹 시대에 트로트는 그 힘을 발휘하며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2020년부터 줄줄이 나온 트로트 오디션 프로그램은 트로트 열풍의 불쏘시개가 됐다. 50대에서 70대를 아우르며 탄탄한 자산으로 활기찬 인생을 살며 유행에 발 빠른 오팔세대(OPAL·Old People with Active Lives)는 아이돌 팬덤 못지않은 트로트 팬덤을 만들었다. 강력한 열정을 자랑하는 트로트 팬덤의 등장에 공연 시장도 부쩍 커졌다. 트로트 가수 공연을 제작한 한 기획사 관계자는 "예전엔 지역의 작은 문화센터 등에서 공연했지만 요즘 인기 트로트 가수들은 2,000석이 넘는 대학교 강당이나 많게는 3만 관중을 동원할 수 있는 고척돔 등 큰 체육관에서 며칠씩 공연한다"고 말했다. 확 젊어진 가수층과 작곡자 그리고 장르의 융합을 밑거름 삼아 트로트 시장은 쑥쑥 커졌다. 임영웅 같은 Z세대 트로트 아이돌이 등장했고 알고보니 혼수상태 등 30대 작곡팀이 '찐이야' 등의 히트곡을 내 전통 트로트에 변화의 물꼬를 텄다. 성악을 전공한 김호중과 손태진 등이 트로트 가수로 조명받고 크로스오버 음악을 내놓으면서 팬층도 넓어졌다.
이렇게 시장이 커지다 보니 K팝 아이돌그룹에서 트로트 가수로 전향하는 사례도 최근 잇따르고 있다. 탑톡 출신 박현호, 레드애플 출신 이도진, 걸스데이 출신 장혜리, 샤플라 출신 화연, 남녀공학 출신 허찬미 등이 트로트 시장의 문을 줄줄이 두드렸다. K팝이나 발라드 제작자들도 트로트 시장에 뛰어들었다. 비스트 등을 배출한 큐브엔터테인먼트의 노현태 전 부사장은 트로트 가수인 김호중과 금잔디, 안성훈이 속한 생각엔터테인먼트 대표를 맡고 있고, 성시경 등을 매니지먼트했던 김태훈 호엔터 대표는 장민호를 트로트 가수로 키웠다.
제작자들은 ①K팝 아이돌보다 활동 주기가 길고 ②투자 비용 대비 가성비가 좋은 점 등을 트로트 가수를 발굴하는 이유로 꼽았다. 올해 데뷔 3년 차 트로트 가수를 데뷔시킨 한 제작자는 "K팝 아이돌은 연습생 시절에만 해도 연간 억대의 비용이 드는데, 내가 지난해 음원을 내고 가수 활동비를 따져보니 7,000만 원 정도 들었다"며 "고령화시대라 트로트와 중년 팬덤 시장 성장 가능성이 크고 트로트는 한 곡만 뜨면 평생 행사 다니는 데는 문제없어 웬만한 아이돌보다 트로트 가수의 미래가 밝다고 생각했다"고 이 시장 문을 두드린 이유를 들려줬다. 김진우 써클차트 수석 연구위원은 "중장년 팬덤의 젊은 트로트 아이돌에 대한 열광은 일본을 달군 '욘사마 열풍'과 닮았다"며 "중장년 팬덤 시장이 워낙 커져 트로트 시장까지 활성화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다만 일각에선 트로트 시장이 이미 정점을 쳤다는 해석도 나온다. 김상화 음악평론가는 "2020년 '미스터트롯' 대비 이번 '미스터트롯2' 결승전 문자 투표수는 3분의 1 토막이 났다"며 "트로트 음악의 소비층이 눈에 띄게 늘지 않은 상황에서 파급력 있는 새로운 트로트 아이돌이 얼마나 등장하느냐가 시장 유지의 관건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