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국의 결단"이라지만... 연금개혁 밀어붙인 마크롱, 정치 생명은 벼랑끝

입력
2023.03.22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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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각 불신임 부결로 '연금개혁 법안' 효력 발생
"이익보다 손해 큰 '피로스의 승리' 불과" 평가
국민적 분노 고조... 내용적·절차적 정당성 실종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연금 개혁' 입법 마무리 수순을 밟고 있다. "연금 개혁은 미래세대를 위한 것으로,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고 했던 마크롱 대통령으로선 값진 성취가 눈앞이다. 집권 1기 때 추진하다 실패한 과제였기에 개혁 성공은 더 간절했다.

그러나 프랑스 내부는 물론, 국제사회에서도 '피로스의 승리'(이익보다 손해가 더 큰 승리)로 평가하고 있다. 마치 '구국의 결단'인 것처럼 밀어붙인 연금 개혁을 매듭짓는 대가로, 본인의 정치 생명은 벼랑끝에 서게 됐다는 얘기다.

내각 불신임안 '겨우' 부결

프랑스 하원이 20일 오후(현지시간) 표결에 부친 내각 불신임안은 가까스로 부결됐다. 투표에 참여한 573명(재석 577석 중 4석 공석)의 의원 중 278명이 찬성했다. 내각 사퇴에 필요한 287석보다 고작 9표 모자랐다. 르네상스 등 여당(250석)과 불신임 투표 불참을 당론으로 정했던 공화당(61석) 의석수를 감안하면 찬성표가 훨씬 적었어야 했는데도, 결과는 달랐다. 무더기 이탈표가 발생한 셈인데, 마크롱 정부에 대한 의회의 불신이 상당했음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사실 내각 불신임안 표결 자체가 마크롱 대통령의 협상력·설득력 부재 증거다. 마크롱 대통령은 재선 공약으로 연금 개혁을 걸고 지난해 5월 재집권에 성공했지만, 1년 가까이 의회 및 노동계와 타협점을 찾지 못했다. 연금 개혁을 두고 야당과 워낙 거칠게 대립각을 세웠던 탓에, 향후 국정 운영에서 협조를 구하기도 힘들어졌다. 현재 하원은 여소야대 구조라 야당 지지 없이 정부·여당이 입법을 하기는 어렵다.


국민적 실망·불신, 갈수록 고조

'내각 총사퇴'라는 최악의 사태는 피했으나, 국민들은 이미 마크롱 정부에 낙제점을 매겼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표결 직전 여론조사기관 엘라베가 공개한 조사 결과를 보면, 국민 68%가 '내각 불신임안이 채택되길 바란다'고 답했다. '내각 불신임안이 통과되지 않아도, 연금 개혁을 주도한 엘리자베트 보른 총리는 (자진) 사퇴해야 한다'고 답한 비율도 68%였다.

마크롱 대통령의 지지율 역시 바닥이다. 최근 프랑스여론연구소의 발표에서 그의 국정 수행 지지율은 28%에 그쳤다.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 지난해 5월보다 13%포인트 내려간 수치이자, 유류세 인상에 반대하는 반정부 시위가 격렬했던 2018년 12월(23%) 이후 최저치다.

내용적·절차적 정당성도 '부재'

연금 개혁 반대 여론은 올해 초부터 줄곧 60~70%대를 기록했다. 대규모 총파업도 8차례나 열렸다. 하지만 마크롱 정부는 이를 외면하고 연금 개혁을 추진했다. 연금 개혁의 내용과 관련, 국민들의 충분한 지지를 얻지 못했다는 의미다.

절차적 정당성도 결여됐다는 지적이 많다. 보른 총리는 의회 내 반발로 법안 통과가 쉽지 않을 것을 판단되자, 아예 의회 표결 절차를 생략하는 헌법 49조 3항을 꺼내 들었다. 현행법을 활용한 것이라 해도, '꼼수'라는 지적이 우세하다. 엘라베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69%는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행위"라고 답했다. 보른 총리는 20일 "헌법 49조 3항은 '독재자'의 발명품이 아니다"라고 항변했으나,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지는 미지수다.

사회적 혼란·갈등 격화 책임도

사회적 혼란과 갈등이 폭발한 것도 마크롱 대통령이 짊어져야 할 책임이다. 이미 프랑스 곳곳은 노동자들의 파업 참가로 인해 대중교통, 환경 미화 등 주요 기능이 마비됐다. 시위는 과격해지고 있다. 내각 불신임안 투표가 이뤄지던 시각에도 파리에선 수천 명이 자발적으로 모여 항의 시위에 나섰다. 프랑스 언론 르피가로는 "폭력 행위 등으로 234명이 체포됐다"고 전했다.

"파업이 계속돼야 한다"는 여론도 65%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당분간 프랑스는 '연금 개혁'이 야기한 대혼란으로 계속 몸살을 앓을 것이라는 뜻이다.

신은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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