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비 벗어나도 도피처는 또 다른 사이비"… 탈출자 지원책 마련 시급

입력
2023.04.01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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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 종교 탈출 후 불안·중독증 호소
매년 800명 탈출 상담... "실제론 10배"
"美英처럼 '원스톱' 지원센터 설립해야"

“힘든 마음을 털어놓을 곳이 없다는 게 가장 힘들어요.”

16년간 기독교복음선교회(JMS)에서 활동하다 얼마 전 탈퇴한 A씨가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더 이상 JMS 신도가 아니지만, 하루를 버텨내는 일이 이토록 힘겨울 줄 몰랐다. 오랜 시간 절대자의 허상에 매달린 스스로를 원망하다가도, 주변에 과거가 들킬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갑자기 엄습하곤 한다. A씨는 31일 “반려동물을 산책시킬 때 말고는 사람 만나기가 무서워 외출도 삼가고 있다”고 토로했다.

매년 800명 넘게 '사이비' 탈출 문의

여성 신도 성(性)착취 등 JMS의 반윤리적 행태를 고발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 방영을 계기로 ‘사이비 종교’를 놓고 다양한 공론화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가까스로 사이비에서 벗어난 탈출자들도 그중 하나다. 장기간 종교에 세뇌돼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심리적 억압 상태에 놓인 피해자가 다수지만, 이들의 일상 회복을 돕는 지원 대책은 사실상 전무한 실정이다.

사이비냐 아니냐를 무 자르듯 나누는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한국 기독교 10개 교단 이단대책위원장협의회는 반윤리적ㆍ반사회적 행위를 일삼는 종교집단을 사이비로 정의한다. 협의회는 내부적으로 JMS나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신천지), 만민중앙성결교회 등 교리에 오류가 많고 반복적으로 문제를 일으킨 교파를 사이비로 분류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공식 분류는 없더라도 사이비 종교가 한국사회 전반에 깊숙이 침투해 있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2013~2022년 한국기독교이단상담소협회에 접수된 사이비 탈출 상담은 8,437건에 이른다. 연간 800명이 넘는다. 이 수치도 빙산의 일각이란 분석이 나온다. 진용식 이단상담소협회장은 “전체 탈출자 중 상담 비중은 10%도 안 된다”고 단언했다. 그의 말이 맞는다면 실제론 연간 8,000명 가까이가 사이비 종교의 마수에서 헤어나오려 고민하고 있다는 뜻이다.

"탈출자, 마약·도박중독자 심리와 비슷"

탈출자 대부분은 오랜 방황을 겪는다. 인생의 전부라 여겼던 종교가 가짜라는 데서 오는 허망함과 시간을 낭비했다는 자책 탓이다. 마약ㆍ도박 중독자와 유사하다는 진단도 있다. 섬세한 심리 치료와 지원이 절실한 셈인데, 피해자들을 위한 전문기관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들은 또 변변한 직업이 없는 경우가 많아 민간 심리 상담센터나 정신과 문을 두드리기엔 비용 부담이 크다. 설령 이런 기관을 찾아가도 사이비 종교에 대한 전문 지식을 갖춘 인력이 적어 효과를 장담할 수 없다.

이단상담소협회가 운영하는 상담센터도 탈출이 급선무라 교리 상담만 하기에도 벅차다. 신형욱 경기 구리 이단상담소장은 “사이비 종교 탈출과 심리 치료까지 병행하기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탈출자들이 도피처로 또 다른 사이비에 빠져드는 사례도 종종 발견된다. 이단종교 전문가 탁지일 부산장신대 신학과 교수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초기 신천지 문제가 터지면서 5,000명 정도가 탈퇴했는데 상당수가 새로운 사이비 종교에 가입했다”고 설명했다.

한국보다 사이비 종교의 폐해를 먼저 겪은 미국과 유럽은 지원체계가 상대적으로 잘 갖춰져 있다. 영국은 정부와 학계, 교계 공동으로 ‘인폼(INFORM)’이라는 종교연구기관을 운영하고 있다. 촘촘한 인맥을 바탕으로 탈출자들에게 공신력 있는 정보를 제공하고 상담 전문가를 연결해주는 기능을 한다. 미국도 민간 비영리 단체인 ‘익사(ICSA)’가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탁 교수는 “한국도 사이비 종교 문제에 일괄 대응하는 대표기관 설립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이서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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