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을 따라가려면 멀었지만

입력
2023.03.22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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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라운드 탈락이라는 허망한 성적의 책임 소재를 두고 설왕설래가 이어진다. 스트라이크조차 못 던지는 투수들의 형편없는 수준을 보며 허탈, 분노를 넘어 자괴감이 든 건 이번이 처음이다. 코로나 시국에 ESPN에서 중계권을 사 갔을 정도로 세계에서 핫한 리그로 떠올랐던 ‘K베이스볼’의 민낯은 참담했다. 미국과 일본의 결승전만 남겨 놓은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얘기다.

WBC는 야구의 세계화를 표방하면서 미국 주도로 2006년 야심 차게 출범한 대회다. 축구와 달리 일부 국가만 즐기는 야구에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던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끝으로 퇴출을 결정하자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아예 우리가 세계 최고 야구 대회를 만들자”라고 나섰다. 하지만 정작 대회를 만든 그들이 시큰둥했다. 구단들과 선수노조가 부상 염려 등으로 슈퍼스타들의 차출을 거부했고, 미국 야구팬들도 정규시즌 외엔 별 관심이 없었다. ‘세계 최고 야구선수들의 장’이라는 취지는 무색해졌고 매번 폐지론, 무용론이 나온다.

코미디 같은 규정들도 대회의 격을 깎아내렸다. 우리나라가 준우승을 차지한 2009년 2회 대회에서는 일본과 무려 5번이나 맞붙는 해괴한 방식으로 빈축을 샀다. 부모의 국적이나 출생지까지 아우르는 폭넓은 국적 선택도 국가 대항전이라는 몰입도를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팀 전력을 좌지우지했던 강타자 알렉스 로드리게스는 1회 대회 때는 미국 대표로, 2회에는 도미니카공화국 대표로 각각 나갔다. 나고야 출생인 이정후(키움)도 일본 대표팀으로 뛸 수 있다니 기가 막힌 일이다. 일부 국가에 우수 선수들이 편중돼 있는 야구 저변을 감안한 조처라고는 하나 ‘국가대표’라는 희소성과 무게감을 생각하면 아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광탈'에 속이 쓰려도 이번 대회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선수 전원이 별도의 생업에 종사하는 ‘투잡팀’ 체코의 선전, 야구 불모지 영국의 역사적인 첫 승, 탈락할 뻔했던 우승후보 미국과 일본의 극적인 역전승 등 이변과 명승부가 속출하면서 역대 가장 흥미롭고도 전력 평준화가 이뤄진 대회가 아닌가 싶다.

WBC 출범 초창기 가장 큰 혜택을 입은 팀은 일본과 한국이다. 특히 1, 2회 대회 4강과 준우승이라는 호성적을 거둔 한국에는 프로야구의 르네상스를 가져다준 고마운 대회다.

아시아의 선전 이후 메이저리거를 다수 보유한 미국과 중남미 국가들이 최고 전력을 꾸리기 시작하면서 WBC 열풍은 점차 확대되는 모양새다. 메이저리그 슈퍼스타들도 적극 참여하고 몸을 사리지 않는 플레이로 편견을 지웠다. 미국 대표팀 주장 마이크 트라우트(LA 에인절스)는 "WBC는 내 야구 인생에 가장 즐거운 경험이다. 이렇게 재미있을 줄 몰랐다"며 만족감을 나타냈다.

초대 대회 출범을 앞두고 버드 셀릭 당시 메이저리그 커미셔너는 “처음으로 최고의 야구선수들이 국제 경기에서 모국을 위해 뛰는 역사적이고 전례가 없는 국제적인 대회가 될 것"이라고 청사진을 제시했다. 18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 말에 조금은 가까워지고 있다. WBC는 퇴출된 올림픽 재진입을 위해서, 야구의 세계화를 위해서 꼭 필요한 대회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크고 작은 논란과 시행착오에도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다.

성환희 스포츠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