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의 BTS’를 키우려면

입력
2023.03.20 16:00
26면
성급한 규제 완화·정책 실패로 SVB 몰락
‘규제완화→금융위기→정부구제’ 또 출현
금융 혁신은 안정성과 균형 맞춰 추진해야

“우리 금융산업에서도 BTS와 같이 글로벌 금융시장을 선도하는 플레이어가 출현할 수 있도록 금융규제를 혁신하겠다.” 지난해 7월 김주현 금융위원장이 ‘금융규제혁신회의’ 출범 때 밝힌 야심 찬 목표다. 김 위원장은 “금산분리, 전업주의 등 과거의 틀에 얽매이지 않겠다”며 금융시장 건전성을 위해 금과옥조로 여겨지던 원칙들도 과감히 고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유감이지만, ‘금융의 BTS’는 이미 미국에 존재한다. 바로 요즘 국제금융 뉴스의 주인공인 실리콘밸리은행(SVB)이다. 40년 전에 스탠퍼드대 교수가 혁신적 사업 아이디어를 가진 학생들이 사업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 안타까워 지역 은행가들과 함께 벤처 맞춤형 은행으로 SVB를 설립했다. SVB는 벤처산업과 기업가를 가장 잘 이해하는 은행이란 명성을 쌓으며 세계적 네트워크 기업인 시스코를 비롯해 실리콘밸리의 오늘을 이끄는 스타 기업들을 키워냈다.

이렇게 사랑받던 SVB의 몰락 원인은 미국 금융당국의 조사로 전모가 드러날 것이다. 하지만 현재까지 미 언론들이 지목하는 주요 원인은 트럼프 정부 시절인 2018년 5월에 만든 ‘경제성장, 규제 완화 및 소비자보호법’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금융 규제를 대폭 강화한 ‘도드-프랭크법’을 수정한 것이다. 새 법은 첨단 핀테크 사업 육성을 명분으로 건전성 규제 대상 은행의 자산 기준을 500억 달러에서 2,500억 달러로 대폭 상향했다. 이로써 SVB 같은 중형 지역은행은 규제에서 벗어나 손쉽게 성장할 기회를 잡았다. 실제 SVB의 자산규모는 2017년 말 512억 달러에서 지난해 2,200억 달러까지 늘어났다. 결국 SVB는 성급히 덩치를 키우다, 비슷한 경로를 밟았던 수많은 금융사들처럼 비극적 결말을 피하지 못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SVB 파산이 “충분히 예측 가능했던 금융 규제와 통화 정책 실패의 합작품”이라고 진단한다. 규제를 완화하면서 급속도로 금리를 올리다 보니, 금융 시스템이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결과 금융사가 파산하면, 정부가 나서 금융사와 거액 예금자를 보호하는 사태가 15년 만에 재현되고 있다.

SVB의 파산으로 과감한 규제 혁신을 추진해 온 우리 금융위의 행보도 꼬이는 모양새다. 금융위 태스크포스(TF)는 은행 경쟁 촉진을 위해 소규모 특화은행 도입 가능성을 타진하며 SVB를 적용 모델 중 하나로 검토했다. 하지만 파산 이후 은행권 진입 장벽을 낮추는 방안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명박 정부 때도 취임 초기 ‘금융산업 선진화, 금융시장의 글로벌화’를 내세우며 금융규제 완화를 추진했다. 하지만 그해 9월 미국 리먼 브러더스 파산으로 위기가 고조되며 제한적 완화로 마무리됐다. 한국에서도 15년 만에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금융에서 비슷한 실패가 되풀이되는 이유는 단기간에 가시적 성과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대형 은행 중심 과점체제, 비효율과 낡은 규제 등의 개혁은 꼭 필요하다. 하지만 금융 시스템은 ‘안정성’과 ‘혁신’ 사이에 균형을 맞추기가 까다롭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흔히 정보통신 기술을 이용한 ‘핀테크’가 그 어려움의 돌파구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SVB가 36시간 만에 초고속 파산한 것은 핀테크의 상징인 스마트폰 은행 앱이 신속한 예금인출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금융 BTS ’ 육성은 과감한 개혁 추진력과 함께 단 하나의 위험 요소도 놓치지 않겠다는 집요함, 적절한 타이밍을 기다리는 끈기까지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 여기에 그 결실을 다음 정부에 넘겨줄 수도 있다는 여유도 필요하다.

정영오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