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는 누군가에게는 실용적인 이동의 수단이며, 사업의 한 도구일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애틋한’ 혹은 ‘선망’과 같은 감정과 감성의 대상이기도 하다. 아마 허머의 차량들이 대표적일 것이다.
군용차량을 그대로 도로로 옮기며 시작되었던 허머의 역사는 긴 시간을 이어간 것도, 그렇다고 찬란한 ‘판매 실적’을 올린 것도 아니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허머에 대한 추억을 그리는 이들이 많다.
군용차량에 가장 가까운 존재, 허머 H 모델들은 어떤 역사와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1992~2006 // 군용차량의 도로 진출, 허머 H1
흔히 허머 H1을 GM의 차량으로 많이 알고 있으나 그 시작은 미국의 자동차 제조업체인 AM 제네럴(AM General)에 있다. AM제네럴은 군용 차량을 중점으로 생산해왔고 1970년대에는 일부 버스를 제작한 경험도 있다.
그러던 1979년, AM제레럴은 미군의 새로운 경량 유틸리티 차량(LUV) 사업에 참여하기 위한 새로운 차량의 청사진을 마련했다. 이 프로젝트가 바로 HMMWV이며, 해당 프로젝트가 진행되며 ‘험비(Humvees)’로 공식 명칭을 부여 받았다.
AM제네럴은 험비의 성공에 자신감을 얻고 다시 한 번 양산차 시장에 ‘AM제레널’의 이름을 알리기 결정했다. 이에 따라 1992년,’험비의 일반 도로 주행 사양’을 개발해 허머(Hummer)라는 이름으로 대중들 앞에 내놓게 됐다.
허머는 말 그대로 군용 차량을 그대로 일반 주행 차량, 즉 ‘민수용’으로 변환한 것으로 차량의 기본적인 구조나 설계, 그리고 구동계 등 모든 부분이 군용의 ‘험비’와 동일한 것이 특징이다.
대신 일반차량으로 구성된 만큼 기존의 군용 장비 및 도색 등을 제외하고 에어컨을 비롯한 여러 편의사양 등을 더했다. 다만 군용 차량인 만큼 체격 대비 ‘공간의 여유’는 다소 아쉬웠다.
데뷔 초의 파워트레인은 6.2L 디젤 엔진과 V8 5.7L 볼텍 엔진 등이 탑재됐다. 그러나 군용 차량과 달리 ‘주행 효율성’ 그리고 보다 빠른 속도의 ‘고속 주행’ 등이 요구되는 일반 차량에 비해 빈약한 점을 지적 받았다.
AM제네럴은 이후 디젤 엔진을 새롭게 개량해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더하는 듯 했지만 ‘설계부터 군용 차량’인 허머의 가격, 그리고 여전히 부담스러운 효율성 및 관리성은 넘기 힘든 벽이 되었다.
허머는 이후 조금 더 ‘일반 차량에 가까운’ H2와 체격이 대폭 작아진 H3 등으로 인해 2001년부터는 ‘허머 H1’으로 명명되었다. 그리고 2005년에는 6.6L 듀라맥스 디젤 엔진을 탑재한 고성능 사양인 H1 알파를 선보이며 ‘특별함’을 강조했다.
한편 양산 사양의 허머 H1은 2006년을 끝으로 단종됐지만 군용 사양의 험비는 2018년까지 꾸준히 생산, 납품됐다. 더불어 허머 H1의 1호 고객은 배우이자 정치인인 아놀드 슈워제네거(Arnold Schwarzenegger)로 많은 화제가 되었다.
2002~2009 // GM의 경험이 담긴 허머 H2
2002년 AM제네럴은 GM과의 계약을 바탕으로 새로운 허머를 개발한다. 완전한 군용 차량에서 시작되었던 H1과 달리 H2는 GM의 양산차량 플랫폼인 GMT800 플랫폼을 기반으로 개발되어 차량의 체격 및 형태 등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실제 GMT800 플랫폼은 GM의 대형 픽업트럭, 즉 캐딜락 에스컬레이드 EXT와 쉐보레 실버라도, GMC 유콘 및 시에라 등에 사용된 것이다. 덕분에 H2는 기존 H1보다 한층 작고, 세련된 형태를 갖게 됐다.
그래도 허머 고유의 견고한 디자인, 그리고 직선적인 디자인이 담겨 ‘허머의 디자인 기조’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더불어 GMT800 플랫폼의 특성을 살린 픽업트럭 사양, H2 SUT도 등장해 마니아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데뷔 초기에는 V8 6.0L 엔진이 중심이 되었고 2008년 부분 변경을 거치며 V8 6.2L 엔진과 6단 변속기가 적용되어 주행 성능 및 효율성 등이 개선됐다. 다만 그럼에도 ‘절대적인 효율성’은 아쉬울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H2는 기존의 H1가 ‘운영의 부담’이 컸던 것에 비해 보다 현실적인 체격과 구성을 갖췄던 만큼 2002년부터 2009년까지 15만대 이상의 판매 실적을 올리며 ‘의미있는 성과’를 냈다.
2005~2010 // 더욱 작은 체격의 허머 H3
통상 세대 교체, 혹은 ‘새로운 모델’이 등장하거나 차량의 이름이 더해진 숫자가 커지는 경우 ‘차량의 체격’ 역시 커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허머 H3는 이러한 기조를 완전히 뒤엎었다.
완전한 군용차량에서 시작된 허머 H1에서 GMT800 플랫폼을 쓰며 작아진 H2에 그치지 않았다. AM제네럴은 쉐보레 콜로라도 등과 같은 GM의 미드 사이즈 픽업트럭 플랫폼인 ‘GMT355’를 기반으로 개발된 것이 바로 H3다.
실제 H3는 전장이 4,800mm 수준에 불과했고, 픽업트럭인 H3T이 되어야 5,400mm에 이를 수 있었다. 새로운 플랫폼을 사용한 만큼 전폭이나 전고도 작아졌다. 여기에 ‘공간 패키징’이 우수하지 못해 실내 공간이 다소 좁다는 평을 받았다.
파워트레인은 5기통 구조의 3.5L 및 3.7L 가솔린 엔진이 마련됐고 보다 우수한 성능을 원할 경우에는 300마력을 내는 V8 5.3L 사양이 마련됐다. 변속기는 5단 수동 변속기(3.5L 한정)과 4단 자동 변속기가 마련됐다.
전체적인 주행 성능은 나쁘지 않았으나 허머 특유의 ‘처참한 주행 효율성’이 발목을 잡았다. H3는 허머 라인업의 엔트리 사양처럼 운영되었고 가격 역시 비교적 저렴했다. 하지만 H2 대비 편의사양이나 기능 등이 부족하다는 평을 받았다.
이러한 이유로 일각에서는 H2보다 상품성이 나쁘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그래도 2005년부터 2009년까지 16만대에 가까운 판매실적을 올리며 시장에서의 입지를 다졌다.
새로운 전환점을 맞은 허머
허머 브랜드가 간판을 내린지 10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지만, 허머에 대한 향수와 추억을 가진 이들이 많았다. GM은 이러한 기조를 파악하고 ‘허머’를 새롭게 선보일 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2021년, GMC의 하이엔드 전동화 라인업에 허머라는 이름을 앞세우고 극한의 퍼포먼스, 그리고 보다 강력한 패키징과 ‘허머 고유의 감각’을 갖춘 새로운 전기 픽업트럭인 ‘GMC 허머 EV’를 공개했다.
GM은 GMC 허머 EV의 공개에 이어 사전 계약을 실시, 뜨거운 인기를 과시했다. 이후 GM은 SUV 사양인 허머 EV SUV까지 공개하며 더욱 탄탄한 ‘새로운 허머 디비전’을 구축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