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16일 한일 정상회담에서 끝내 일제 강제동원에 대한 직접적인 사과 표현을 하지 않았다. 대신 식민지배에 대한 포괄적 사과를 담았던 과거 담화를 계승한다는 입장만 반복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정치적 부담에도 “(제3자 변제에 따른) 구상권 청구는 없다"며 호의적 제스처를 보냈지만 기시다 총리는 성의 있게 호응하지 않았다. '셔틀외교' 복원 등 관계 회복의 물꼬를 튼 이번 회담의 의미에 비춰 일본 측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기시다 총리는 정상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우리 정부가 앞서 6일 발표한 강제동원 배상 해법에 대해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양국 관계를 되돌리기 위한 조치로 평가한다"며 일본은 이전 내각의 역사 인식을 계승한다고 밝혔다. 이어 '한국 정부의 노력에 비해 일본의 호응조치가 낮다는 의견이 많다’는 한국 기자의 질문에 “호응조치와 관련해서는 오늘도 구체적인 성과가 있었다”면서 “양자 (정상) 간 12년 만의 방문이었고, 윤대통령과 개인적 신뢰관계를 확인했다”며 다소 엉뚱한 내용으로 답했다.
이 같은 발언은 기시다 총리가 앞서 밝힌 입장에 비해 별 진척이 없어 보인다. 기시다 총리는 6일 의회에 출석해 “역대 내각의 역사 인식을 전체적으로 계승한다”는 애매한 말만 되풀이했다. 우리 정부가 국내 기업의 기부로 일본 피고기업 대신 피해자에게 배상금을 지급하는 ‘제3자 변제 방식’을 공식화했지만 일본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당시 박진 외교부 장관은 "우리가 물컵의 반을 채웠다. 남은 절반은 일본의 몫"이라고 공을 넘겼지만, 우리 측이 기대한 답변은 없었다.
기시다 총리는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계승하겠다고만 했을 뿐 선언에 나오는 사과 표현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오부치 게이조 전 일본 총리는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정상회담에서 “일본의 식민지배로 한국민들에게 큰 손해와 고통을 안겨줬으며 이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다만 대통령실 관계자는 “역대 일본 정부가 50여차례 (과거사에 대한) 사과를 했는데 한 번 더 받는 게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면서 “무라야마 담화와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간 나오토 담화는 우리로선 만족스러운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를 총체적으로 계승한다고 했기에 충분하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처럼 기시다 총리가 전향적인 태도를 취할 수 없는 건 일본 국내정치 상황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일본은 4월 통일지방선거와 중의원 보궐선거를 앞두고 있는데 과거사 문제에 직접 사과한다면 당장 표심 공략에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한 듯하다. 결국 강제동원 배상 문제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이미 해결됐다는 기존 입장에서 전혀 바뀌지 않은 셈이다.
이에 먼저 손을 내민 우리 정부도 난처한 입장에 놓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최은미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일본 여당인 자민당 내 보수파의 입김이 센 상황에서 기반이 탄탄하지 못한 기시다 총리가 그들의 입장을 크게 거스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