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민 ♡ 동신’ ‘도연 왔다감 2018. 11’ ‘hi’… 아름다운 풍경을 두 눈과 마음으로만 담아가기 아쉬웠을까, 사람들은 구태여 나무에 ‘방명록’을 새겼다. 지난 10일 강원 인제군 인제읍 자작나무숲. 바라만 봐도 치유가 된다는 자작나무의 새하얀 기둥에 연인들의 '사랑의 약속'부터 누군가의 이름 석 자 등이 무수히 새겨져 있었다. ‘이상기온’ ‘학교’처럼 맥락을 알 수 없는 단어도, 여기저기 화풀이하듯 '직직' 그어 놓은 무의미한 칼자국도 적지 않다.
자작나무숲 내에서도 일반 탐방객들에게 개방된 구역, 그중 일부만 돌아봐도 이 같은 흔적은 쉽게 찾을 수 있다. 나무에 새겨진 날짜를 토대로 낙서가 주로 이루어진 기간도 추정할 수 있다. 가깝게는 몇 달 전부터 멀게는 5년여 전까지, 흔적조차 희미해 눈에 잘 띄지 않는 건 그보다 훨씬 오래전 새긴 흉터다. '악습'은 수십 년 전부터 이어져 온 것으로 보인다.
유명 관광지의 ‘낙서 테러’는 시대와 국적을 가리지 않는 유서 깊은 골칫거리다. 특히, 살아 있는 나무에 ‘새긴’ 낙서는 잉크나 페인트 등으로 건물 벽에 ‘그린’ 낙서에 비해 잔인하다. 일상에서 쓰는 날카로운 도구로 쉽게 파낼 수 있는 데다, 나무 표면이 고르지 못해서인지 상처가 대부분 깊고, 그 흔적은 영원히 남는다. 이 정도면 낙서가 아니라 명백한 훼손이다.
자작나무숲을 관리하는 산림청 관계자는 이날 몸통에 5~6㎜ 이상 깊게 파인 낙서를 가리키며 “(이런 낙서를 하는 사람들은) 못이나 날카로운 칼 같은 도구를 미리 준비해 오기도 한다”며 “필기구든 못이든 모든 낙서가 보기 안 좋은 건 마찬가지겠지만, 이렇게 나무 껍질 속까지 훼손한 흉터는 회복이 어렵다. 이곳을 통해 병균이 침투할 수도 있어 나무의 생명까지도 위험해진다”고 설명했다.
설명을 듣고 자작나무 몸통을 들여다보니 무수히 많은 자잘한 줄무늬가 가로로 나 있었다. 자잘한 흉터 같기도 한 이 줄무니는 나무의 숨구멍 역할을 하는 '피목'으로, 나무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조금 더 자세히 보니 이 피목들 사이사이에 인위적으로 새겨진 ‘무늬’들이 눈에 들어왔다. 낙서의 흔적들이다. 얼핏 보기에는 전혀 문제없어 보이는 나무들도 조명을 가까이 비춰보면 껍질 아래에 이렇게 움푹 파인 흉터가 나타난다. 누군가 오래전 남긴 낙서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다.
관계자에 따르면 자작나무숲이 본격적으로 인기를 끌면서 낙서객이 기승을 부리던 4~5년 전보다 지금은 사정이 많이 나아졌다. 그렇다 하더라도 성수기 기준 하루 3,000명 넘게 몰려오는 탐방객들을 일일이 쫒아다니며 감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단속보다는 성숙한 시민의식이 절실하다.
낙서 테러는 인제 자작나무숲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남 담양군 죽녹원 같은 유명 관광림이나 식물원은 물론 도심 공원의 나무에도 날카로운 칼날 자국이 흔하다. 지난 13일 서울 선유도공원에서도 이 같은 흔적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표면이 물러 원하는 문자나 모양을 새기기가 용이하고 빛깔도 아름다운 자작나무와 대나무가 주로 낙서의 희생양이었지만, 두꺼운 수피를 두른 다른 종의 나무도 낙서객들은 가리지 않았다.
통상 자작나무가 한 겹의 수피를 새로 두르는 데 1년이 걸린다. 아무리 얕게 새긴 낙서라도 최소 1년 동안은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셈이다. 여기서 한 겹 한 겹 더 깊게 파고 들어갈수록, 염료에 의해 진하게 착색될수록 회복 기간은 길어진다. 수피가 완전히 벗겨지거나 내부 줄기까지 훼손될 경우 수십 년, 혹은 평생 그 상처를 안고 살아야 한다.
한때 '자작나무 껍질에 새긴 사랑은 영원히 간다'는 속설이 번졌고, 자작나무 훼손 사태의 원인이 됐다는 해석도 있다. 새하얀 자작나무에 이름을 새긴 이들이 모두 영원한 사랑을 맺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들이 영원한 상처를 자작나무에 남긴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