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한테는 하나도 변한 게 없어요. 처음 2, 3일 만 흔들리더니 지금은 전혀. 내가 암이라는 생각 자체도 다 잊어버렸습니다.”
한국 단색화의 거장 박서보(92) 화백이 지난달 폐암 3기 판정을 받았다는 사실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서 공개했다. 그러나 그는 평생 이어온 창작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캔버스 수백 점을 만들어 새로운 작업에 나섰다. 내년 여름에는 그의 이름을 딴 첫 미술관까지 제주 서귀포시 JW메리어트 제주 리조트&스파에 세워질 예정이다. 1970년대부터 ‘묘법(妙法)’으로 불리는 독창적 작업 방식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일군 박 화백의 새로운 도전이다.
지난 14일 박서보미술관(가칭)이 건립될 자리에서 열린 기공식에 참석한 박 화백은 폐암을 진단받았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면서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어쩌자고 나에게 이런 형벌을 주는가"라고 생각했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그는 금세 마음을 다잡았다. 좌절하지 않고 제주에 머물면서 그림에 몰두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박 화백은 “암을 친구로 모시자, 함께 살자, 치료는 슬슬 봐 가면서 하고 3개월에 한 번씩 (서울에) 가서 몸 상태를 검증하자. 생각을 그렇게 정리했다”면서 그 이유를 “방사선 치료를 하게 되면 내가 일을 못한다”고 밝혔다.
평소 예술을 ‘수신(修身)의 도구’라고 설명해왔던 박 화백은 이날 새로운 계획을 공개했다. 그는 “외국에서 몇 십년 지난 신문들을 모아서 한 600점의 캔버스를 만들어서 신문지 위에다가 연필로, 또 오일 컬러로 드로잉하는 것”이라면서 “과거에 한 시기에 했던 것인데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다”고 말했다. 박 화백은 1977년 프랑스 파리의 한 호텔에 머물던 시절, 앞방 투숙객이 버린 신문지를 주워서 그 위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이러한 묘법 그림은 체념의 그림, 비워내는 그림으로도 유명하다. 캔버스에 흰 칠을 하고 물감이 마르기 전에 연필로 선을 그으며 물감을 지워나갔던 초기 묘법부터 한지에 색을 칠하고 물감이 마르기 전 손이나 막대기, 자 등으로 종이를 긁어내 고랑을 만드는 중기·후기 묘법에 이르기까지 핵심은 ‘비워냄’에 있다.
스페인 건축가 페르난도 메니스가 설계를 맡은 박서보미술관 역시 인위적인 성격이 드러나는 건축 요소를 최대한 줄이는 방식으로 설계됐다. 미술관은 지상 1층~지하 3층 높이로 현무암을 사용해 주변의 야트막한 경관과 어울리도록 꾸며질 예정이다. 무엇보다 태양광이 지하 전시실까지 닿는 선큰(sunken) 구조로 지어진다. 전시공간 전체 면적이 900㎡ 정도로 큰 규모는 아니다. 박 화백은 “난 꼭 미술관이 커야만 한다고 보지는 않는다”라며 “커다란 미술관에 결코 지지 않는 그런 미술관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골똘히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박 화백은 당초 고향인 경북 예천군이 건립을 추진하던 또 다른 ‘박서보미술관’에 대해서는 “지금 거의 포기 상태”라며 아쉬운 감정을 드러냈다. 박 화백은 스위스 출신의 세계적 건축가 피터 줌터에게 설계를 맡기려고 했으나 건축가 측에서 공모 형식의 설계자 모집에는 응하지 않기로 했다는 것.
박 화백은 박서보미술관이 건립되면 “모든 사람이 (미술관을) 보고 나면 그 속에 응어리졌던 것들이 치유되기를 원한다”면서 “그것이 내가 그림을 그리는 목적 중 하나”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나를 드러내지 않는 이유는 나를 비워내야만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와서 채워갈 수 있기 때문”이라면서 “서양 미술은 자기 생각을 잔뜩 털어내서 보는 사람들에게 이미지 폭력을 가한다. 나는 그런 예술을 하고 싶지 않다”고 힘주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