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0만 고령고객, 매뉴얼이 없다 ①-2] "젊은 직원 '다다다다' 설명, 눈높이 안 맞는 진열대 불편해요" (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3032013150003926 )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한국일보는 고령층 100명을 대상으로 소비생활 심층조사를 실시했습니다. 기사에 등장하는 '김정식 씨'는 이 조사 113개 응답에서 도출된 '대한민국 평균 어르신 소비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가상 인물입니다.
경기 성남시에 사는 김정식(75·가명) 씨는 1948년에 태어났다. 그는 아직 스스로를 '젊은 오빠'라고 자부한다. 앞선 세대의 일흔 다섯은 병수발을 받거나 불편한 거동 탓에 집에 틀어박혀 있던 나이였지만, 요즘 75세는 청춘 못지않게 팔팔하다. 김씨는 자기 나이를 '중년에서 노년으로 들어가는 문턱 정도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스마트폰과 컴퓨터를 불편 없이 활용한다. 뉴스를 확인하고, 친구들과 메신저 대화를 하거나 유튜브 동영상을 시청한다. 동영상·사진을 찍어 공유하거나, 포털서비스 지도를 이용해 처음 가보는 곳을 찾아가는 정도는 문제없이 할 수 있다.
다만 자신이 없는 건 온라인 쇼핑과 스마트 뱅킹. 이걸 하려면 스마트폰에 뭔가를 잔뜩 깔아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QR코드는 아예 뭔지를 모르고, 무인 키오스크는 되도록이면 피하고 싶다.
오늘은 김씨가 집 밖에서 여러 용무를 처리하는 날. 아침식사 후 집을 나서 ①은행 업무를 본 다음 ②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③오후엔 대중교통으로 이동해 ④병원에서 진찰을 받은 후 ⑤장을 봐서 집으로 돌아오는 동선이다. 일상에서 흔히 일어나는 이 다섯 가지 활동에서 100명의 어르신들이 토로한 불편함과 건의사항을 토대로, 김정식 씨의 바쁜 외출길을 재구성했다.
첫 일은 은행업무. 은행 창구직원 권유로 가입했던 펀드상품 때문이다. 각종 연금을 합친 월 수입 123만원(100명 응답자 평균)을 쪼개 달마다 넣고 있는데, 수익률이 신통치 않아 깨기로 했다.
은행에 들어서니 기다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중년이나 노년 손님들이다. 젊은 사람들은 스마트폰으로 은행 일을 본다지? 그러나 김씨는 돈 거래를 사람 얼굴 안 보고 한다는 게 불안하다. 대기 소파엔 빈 자리가 없고, 선 채로 기댈 수 있는 손잡이 같은 것도 보이지 않는다. 별도 휴게공간이라도 있을까 싶어 직원에게 물어봤더니, 젊은 경비직원의 말이 너무 빠르고 목소리도 높다. 김씨는 은행에도 자기 또래 직원이 있어서 천천히 큰 목소리로 설명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담 차례가 되어 창구에 앉았다. 펀드를 해지하겠다 하니 직원이 ‘환매수수료’나 ‘기준가격’같은 전문용어를 쓰면서 "지금 해지하시면 원금을 못 찾는데 괜찮으신가요"라고 묻는다. 탁 말문이 막혔다. 손님 입장에서가 아니라 은행 입장에서 하는 말을 반복해서 듣다보니 지쳐버렸다. 결국 해지는 포기한 채로 은행 문을 나섰다.
배가 고파 시계를 보니 오전 11시다. 간단하게 밥이나 먹자 싶어 예전에 몇 번 갔던 분식집 문을 열었다. 그런데 웬걸. 자리를 안내하던 아르바이트생은 사라졌고 무인주문기(키오스크)만 떡하니 들어서 있다.
기계로 음식을 주문한 적이 없어 포기하고 길 건너 카페를 찾았다. 간단하게 샌드위치와 음료를 먹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카페에선 직원이 직접 주문을 받았는데, "고객님, 뭐 드릴까요?"하는 말을 서너 번 만에야 겨우 알아들었다. 음악소리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메뉴를 보고 샌드위치와 음료를 시켰다. 직원이 되묻는다. '투샷'이니 '원사이즈'이니 '토핑' 같은 단어를 말하며 자꾸 뭔가를 선택하기를 요구했다.
직원 태도는 친절한데, 무슨 말인지 잘 알 수가 없어 답답하다. "그냥 알아서 해주세요"라고 말하고 끝냈지만, 자신 뿐 아니라 직원도 이 상황을 힘들어하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어렵사리 끼니를 해결한 김씨는 한 종합병원으로 향했다. 몇 년 전 받았던 수술 때문에 1년에 두 번 가는 정기검진이다. 지하철을 타야 하는데, 평소 지하철역을 잘 이용하지 않아 승강장이 좀 생소하다.
열차에 올랐고 문이 닫혔다. 아뿔싸! 반대 방향 열차를 타버렸다. 어쩔 수 없이 한 정거장을 간 뒤 내렸더니, 반대편 승강장을 가려면 개표구를 통과해야 한다. 과거엔 개표구마다 직원들이 나와 있기도 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무인으로 운영된다. 장애인 전용 출입구에 달린 버튼을 눌러 역 직원을 호출했다. 마이크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익숙하지 않고, 직원 목소리도 톤이 높고 빠르다.
"반대편으로 가고 싶다"고 했으나 직원은 개찰구 문을 열어주지 않고 자꾸 뭘 써보라면서 다른 것만 안내했다. 결국엔 짜증이 차올라 "좀 천천히 말해 달라, 못 알아듣겠다"고 소리쳤다. 그제야 열리는 개찰구.
시간이 늦어질 것 같아 서둘러 걸었다. 계단은 많고, 에스컬레이터는 없고, 엘리베이터는 어딘지 바로 찾기 어렵다.
다행히 예약시간에 맞춰 병원에 도착했다. 검진 후 처방전을 받고 병원비를 결제하려니, 직원이 "대기 손님이 많으니 저 무인수납기를 이용해 달라"고 말했다. 그래서 점심 식사 때 피했던 키오스크와 기어이 마주치고 말았다.
한 번 써볼까 싶어 도전해 봤는데, 역시나 화면을 보니 안내문이 너무 복잡해 뭘 먼저 눌러야 할지 혼란스럽다. 고령자 전담 직원이 옆에서 도와주면 좋을텐데, 그 마저도 안 보인다. 다시 원무과 창구로 가서 직원한테 "나 무인수납 몰라요, 여기서 해줘요"라고 말한 다음에야 결제가 가능했다.
김씨는 집으로 가는 길에 식재료와 생필품을 사려고 동네 시장에 들렀다. 식재료 쇼핑을 할 땐 시장 안쪽의 단골가게를 주로 찾는다. 물가가 너무 올라, 조금이라도 에누리 가능한 단골집의 존재가 요즘따라 더 소중하다.
그런데 이게 뭔가. 단골 식료품점이 문을 닫았다. ‘사정상 오늘 쉽니다’라는 안내문만 붙어 있을 뿐. 단골집을 못 가는 전통시장은 불편함 투성이다. 가게마다 문턱이 많고, 자동문이 아니어서 출입이 번거로울 때가 있다. 누군가 시장 바닥에 물이라도 뿌려 놓은 날엔 미끄러워 다니기 힘든 적도 많다.
결국 시장 대신 동네 슈퍼마켓으로 발길을 옮겼다. 물건을 고르기는 했는데, 진열대 높이가 높아 물건이 손에 닿지 않는다. 결국 다른 일을 하고 있던 직원을 찾아서 도움을 받아야 했다.
김정식 씨가 겪은 고충은 평범한 어르신 고객이라면 종종 경험하는 상황이다. 본보가 만난 100명의 어르신들은 △인터넷 쇼핑 등 스마트폰의 유료결제 △무인 키오스크 이용 △대형마트에서 물건 찾기 △지하철역이나 터미널 등의 안내직원 미배치 등에서 공통적으로 어려움을 호소했다.
65세 이상 인구가 내년에 1,000만명을 넘어설 정도로 고령화가 진행됐지만, 어르신들은 업장의 고객 서비스가 여전히 '젊은 고객'의 능력과 선호에 맞춰져 있다고 말한다. 충북 충주시의 김모(81)씨는 “노인만을 위한 상품을 많이 만들어달라는 게 아니라, 온·오프라인 모두에서 시니어 고객을 응대하는 사람들이 더 늘어야 한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비슷한 육체·정신적 상태를 공유하는 노인 직원이 또래 고객을 맞으면 소비생활도 더 편해질 것 같다”고 제안했다.
전문가들도 국내 기업의 '서비스 설계'가 지나치게 젊은 층을 겨냥하고 있다는 점을 문제로 지적한다. 김정근 강남대 실버산업학과 교수는 "기업들도 고령 소비자를 겨냥하는 것이 모든 고객을 만족시킬 수 있다는 '보편적 디자인'의 관점에서 서비스를 설계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66세 최선희씨의 눈으로 본 소비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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