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

입력
2023.03.15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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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년이 흘렀지만 그날의 기억은 또렷했다. “누군 ‘계엄군이 밀고 들어오면 우리도 산다는 보장이 없으니 빨리 빠져나가자’ 하고, 누군 ‘우리가 도망가면 광주는 어떡하냐. 살고 싶으면 혼자 가라’ 하고… 결국 죽든 살든 취재본부에 전원 남기로 했지.” 지난달 28일 한국일보는 5ㆍ18민주화운동을 취재했던 전직 사진부 기자들을 초청해 감사와 존경을 표했다. 앞서 5ㆍ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조사위)가 이들이 기록한 현장 사진들로 행불자 신원파악, 집단발포 상황 재구성 등 진상규명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한 것이 계기가 됐다. 팔순 언저리의 노선배들은 감회에 젖어 ‘80년 광주’를 떠올렸다. “다음 날 새벽 여기저기 총성이 울리고 헬기 소리가 요란하더니 도청이 함락됐어. 끔찍한 광경은 말로 다 못해. 제일 맘 아픈 건 교련복 입은 애들 시신이…”

43년이 지난 지금도 광주에선 그날의 시신이 발굴되고 있다. 조사위는 이날 발표한 2022년 하반기 활동보고서에서 계엄군들의 증언을 토대로 5ㆍ18 당시 암매장된 무연고 유해를 추가 발굴했다고 밝혔다. 또한, 집단발포 당시 저격수가 활동한 사실, 5ㆍ18을 북한과 엮으려던 신군부의 간첩사건 조작 시도 등도 새롭게 밝혀냈다고 했다. 그러나 최초 발포 책임자 규명부터 각종 가혹행위, 집단 학살, 암매장 등 결론 내리지 못한 개별사건들이 여전히 산적해 있다. 진실에 다가갈수록 더 상세한 증언과 결정적 제보가 절실한데, 피해자들의 기억만으론 그 한계를 넘기 쉽지 않다.


43년이 지나도록 가해자의 진정한 사죄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대신 때아닌 ‘피해자 호소’ 논란이 광주벌을 달군다. 5ㆍ18구속부상자회와 5ㆍ18공로자회는 지난달 19일 특전사동지회와 함께 용서와 화해를 담은 ‘대국민공동선언’을 발표했다. 14일엔 5ㆍ18 당시 진압작전에 투입됐던 계엄군이 공개 증언하는 자리도 마련했다. 두 단체는 계엄군 역시 오랜 시간 정신적ㆍ육체적 고통을 받아 온 피해자라는 점을 강조하고, 그날의 진실을 알고 있는 계엄군을 용서하고 양심선언을 이끌어 진상을 밝혀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다른 5ㆍ18 단체들을 비롯한 지역사회는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진정한 사과 한마디 없이 가해자를 피해자로 둔갑시키고, 반인도적 범죄를 ‘공적 임무수행’ ‘노고와 희생’으로 왜곡한 공동선언의 폐기를 촉구했다. 급기야 두 단체가 제43주년 5ㆍ18민중항쟁행사위원회를 탈퇴하면서 갈등의 골은 깊어가고 있다.



43년이 지났지만 사진 속 장면들은 선명하다. 선배들이 생사를 넘나들며 찍은 사진 1,868컷엔 5ㆍ18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누군지 그대로 담겨 있다. 피해자는 집단발포 당일 적십자병원 복도를 가득 메운 부상자, 전남도청이 함락되던 날 계단 밑에서, 거리에서 발견된 무수한 시신, 아들의 관을 끌어안고 오열하는 어머니들이다. 곤봉과 발길질로 군중을 겁박하고 시민에게 총부리를 겨누던 군인들, 전남도청 광장으로 진격하는 전차 위에서 승전의 희열을 만끽하던 계엄군은 명백한 가해자다. 억지로 피해자의 가면을 쓴들 역사의 기억마저 흐려질 리 없다. 가해자가 먼저 참회하고 진상규명에 정식으로 협조해야 한다. 용서와 화해, 명예회복, 국가 차원의 배상은 그다음이다.





박서강 멀티미디어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