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벌써 학문의 역전이 이루어졌다. 일본은 기술과 경제 등 많은 점에서 성취를 이뤘지만, 학문이 '수입학'에 머물러 미끄러졌다."
국문학계 원로 조동일(84) 서울대 명예교수가 도발적인 제목을 단 신간을 최근 출간했다. 이름하여 '한일 학문의 역전(지식산업사 발행)'. 학문 분야에 있어서 한국과 일본의 위치가 역전되었다고 주장하는 조 교수를 지난 13일 경기 군포시 자택에서 만났다.
19세기 후반 적극적으로 서구 문명을 받아들인 이래로, 일본은 유럽문명권의 선진 학문을 재빨리 배우고 따르는 '수입학'에서 성공을 거뒀다. 학문적 성취를 토대로 한 각계의 성취로 1980년대에는 세계 2위 경제 대국의 자리까지 올랐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선진화를 이루지 못한 학계의 풍토가 오히려 오늘날 일본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게 조 교수의 주장이다.
책은 학문의 모든 분야를 다룰 수 없어, 조 교수의 전공 분야인 '문학사'를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자국문학사 서술은 한 나라의 학문 수준을 보여주는 단적인 척도'라는 게 그의 진단이다. 물론 일본도 성취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본은 유럽 밖에서 자국문학사를 처음 쓴 나라다. 하나 저자는 한계가 분명하다고 본다. 1890년 '일본문학사'를 필두로 후속작업이 이어졌지만 "연구의 축적을 거치지 않은 비전문가의 저작일 뿐, 사실 열거에 불과해 자발적 혁신이 없다"는 것이 조 교수 주장의 핵심이다.
더 나아가 조 교수는 일본의 학문이 '동아시아적 관점'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을 '치명적인 결함'으로 꼽는다. 근대의 탈아입구(脫亞入歐)에 사상적 뿌리를 둔 탓에, 한국과 중국 등 이웃을 애써 무시한다는 것이다. 조 교수는 '세계문학의 역사(1971)'를 일본에서 저술된 세계문학사의 대표적 업적으로 들면서도, 철저히 유럽문명권 중심으로 세계문학사가 저술되어 있는 데다 심지어 일본문학도 제대로 취급되어 있지 않다고 냉정하게 평가한다. "일본(한국)문학사를 잘 알려면 동아시아문학사를 알아야 하고, 이를 통해 세계문학사로 나아가야 문학사 이해가 온전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데, 일본에는 동아시아문학사가 없고 수입한 세계문학사만 존재해 기형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일본은 지금까지 29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며, 아시아에서 명실상부 '1위'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는 국가. 문학상만도 가와바타 야스나리(1968), 오에 겐자부로(1994) 등 2명을 배출했다. 이런 나라를 두고 '학문의 후진성' 잣대를 들이밀 수 있을까. 조 교수는 학문에 있어 상보다 중요한 것은 학계의 전반적인 '학풍'이라 꼬집는다. 한 우물을 파서 괄목할 만한 성취는 있지만, 다른 사람과 교섭하는 대화와 토론 문화가 부재하다는 것. "일본 학계는 누가 원본에 가깝게 전승하는지에 집착하며 사제 관계가 수직적으로 존재한다. 한국은 조선시대에도 '논쟁'이 있을 정도로 학문적 논란에 대해 열려 있다. 이 같은 논란은 모든 창조의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300페이지가 채 못 되는 책은 학술서치고는 무척 얇다. 명확한 주제의식과 달리 각론은 충분치 않다. '저자의 희망사항 아니냐'는 비판과 직면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그러나 예상되는 비판에 팔순을 훌쩍 넘긴 원로 학자는 말한다. "5, 10년을 기약할 수 없는 나이라 이번 책에서는 논의의 전체 방향만 우선 제시했다. 후학들이 분발하여 논의를 이어가 주길 바란다. 뿐만 아니라 책이 꼭 일본에서도 번역되어 토론이 확대되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