얇은 견직물인 태피터로 제작된 순백의 웨딩드레스. 자잘한 꽃과 넝쿨무늬가 은색 원단으로 섬세하게 새겨져 화려한 느낌을 준다. 네크라인을 따라 수놓듯 크리스털 스톤과 비즈 구슬 장식이 달렸고, 바닥에 끌리는 긴 스커트 뒷자락은 우아한 분위기를 풍긴다. 한국 패션사의 전설, 고(故) 앙드레 김(1935~2010)이 2009년 '강남문화재단패션쇼'에서 선보인 작업이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는 화려하고 낭만적인 드레스를 입고 미소 짓는 봄날의 신부가 떠오른다.
1세대 패션 디자이너인 최경자·노라노·앙드레 김의 작품 100여 점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서울 공예박물관이 다음 달 2일까지 여는 '의·표·예(衣·表·藝), 입고 꾸미기 위한 공예'전이다.
패션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20세기 우리나라에서 1세대 디자이너로 활동한 3인은 국내 패션 산업을 키워 낸 주역들이다. 대중에게 친숙한 고 앙드레 김은 1966년 파리에서 한국인 최초로 패션쇼를 개최한 디자이너로, 2010년에는 금관문화훈장을 추서받았다. 고 최경자(1911~2010)는 1937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양장점 '은좌옥'을 열고 대한복식디자이너협회, 패션 전문 교육기관인 '국제패션스쿨', 국내 최초 모델양성기관인 '국제차밍스쿨' 등을 세운 국내 패션계의 대모로 꼽힌다. 노라노(95)는 1952년 서울 명동에 '노라노의 집'을 개업한 뒤 1956년 국내 최초로 패션쇼를 열었다. 그의 옷들은 한국 브랜드 가운데 처음으로 1974년 미국 메이시스 백화점에 입점한 것으로 유명하다.
전시에는 이들 디자이너 3인이 만든 의상 35벌이 등장한다. 옷의 기능과 구성을 영상으로 펼쳐내는 1부 '입다'에 이어 근현대 예복을 통해 옷의 사회적 기능을 살펴보는 2부 '드러내다', 3부 '표현하다'에서 이들의 작품과 적용된 기법, 관련자료를 두루 살펴볼 수 있다. 4부 '아카이브 Lab'에는 그들이 직접 착용한 의상, 드로잉과 옷본 등이 나왔다.
눈에 띄는 점은 단순히 유명 디자이너의 패션 계보를 훑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의상에 녹아 있는 수공예 기법을 찾아 패션과 공예의 접점을 모색한 것이다. 자수처럼 특정 부분에 천을 덧붙여 장식하는 '아플리케', 주름을 잡아 입체로 만드는 '플리츠', 실을 변형해 옷감 평면에 변화를 주는 '퀄팅', 원단에 직접 그림을 그리는 '프린트' 등 디자이너가 즐겨 사용한 제작 기법에는 '주름잡고, 수놓고, 덧붙이는' 공예 요소가 배어 있다.
한 올 한 올 완성도 높은 봉제로 완성한 작품에서는 각 디자이너의 수공예적 예술성과 장인정신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최경자 디자이너의 1963년 작품인 '이브닝 코트'는 견을 사용해 페인팅으로 완성한 의복이다. 붓질이 의복에 남아 있어 회화적 요소가 디자인적 요소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앙드레 김 디자이너의 작품에선 특히 천을 덧대는 '아플리케' 방식이 두드러진다. 덧붙이는 작업은 대부분 재봉틀을 이용하긴 하지만, 위치에 따라 직접 바느질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수공예적 성격이 짙다. 앙드레 김은 1980년대 제작한 다수 '이브닝 드레스'에서 아플리케 기법으로 당초문, 용, 봉황, 십장생 등 한국적 콘셉트의 문양을 새겨 넣었다.
김수정 서울공예박물관장은 "이번 기획전시를 통해 전통과 현대를 잇는 복식에 담긴 공예요소와 1세대 패션 디자이너들의 장인정신을 탐구하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며 "공예와 패션에 이어, 공예와 미술, 공예와 건축 등 다양한 '공예융복합전'을 추구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