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0만 고령고객, 매뉴얼이 없다 ②-1] 알바생이 치매노인 관리까지... 日 편의점은 고령사회 비추는 '등대'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어르신의, 어르신에 의한, 어르신을 위한 곳. 일본 도쿄 스가모 지조도리(巣鴨地蔵通) 상점가(스가모 거리)는 고령자들의 쇼핑 천국이다. 고령 소비자들이 대거 모여드는 이곳을, 젊은이의 패션 중심지인 하라주쿠(原宿)에 빗대 '할머니들의 하라주쿠'라 부르기도 한다. 약 800m 거리 양쪽으로 늘어선 200여 개 상점에서 의류, 건강식품, 생활용품 등 고령자를 겨냥한 온갖 물건을 판다. 백발의 손님이 진열된 물건에 관심을 보이면 백발의 사장이 다가와 응대하는 모습도 쉽게 눈에 띈다.
처음 스가모 거리에 고령층이 모이게 된 건 사찰 때문이었다. 상점가 입구에서 170m 떨어진 곳에 고간지(高岩寺)라는 절이 있는데, 아픈 곳을 낫게 해준다는 지장보살을 모시고 있다. 매월 마지막 숫자가 4로 끝나는 참배일에는 몸이 성치 않은 참배객들로 붐빈다. 연 800만 명이 이 절을 찾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고령자들이 스가모 거리를 찾는 것은 신앙심 때문만은 아니다. △자동문을 단 상점 입구 △차 없는 거리 △턱 없는 도보 △도보와 상점 입구를 경사면으로 연결한 구조 △빨간 글씨로 큼지막하게 붙은 가격표 △앉아서 쉴 수 있는 의자 △휠체어도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가게 안 통로 등 '어르신 친화적'인 환경 덕분이다. 그래서 이 거리에선 지팡이를 짚거나 보행기를 끌며 여유롭게 쇼핑을 즐기는 노인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곳에선 백발의 사장님도 흔하다. 1927년부터 2대째 옷가게를 운영해 왔다는 스가모의 터줏대감 A(82)씨는 "40, 50대부터 장사를 시작한 사람들이 이제는 세월이 흘러 어느새 60, 70대에 접어들었다"면서 "나도 50대인 친딸에게 가게를 물려주려고 교육을 시키는 중"이라고 말했다. 지팡이와 보행기 전문점을 운영하는 B(70)씨는 "20년 전에는 도자기를 팔았지만, 그 이후론 지팡이 등을 팔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가게에선 키에 맞는 길이의 지팡이를 고르는 법, 지팡이 손잡이를 올바르게 잡는 법, 지팡이를 짚고 걷는 다양한 방법 등을 상세하게 안내하고 있다. B씨는 "70대였던 단골들이 80세가 넘어서도 오는 모습을 보면 고령화가 많이 진행됐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고 말했다.
도쿄 신주쿠(新宿) 게이오백화점도 스가모 거리처럼 할머니들의 '쇼핑 성지' 중 하나다. 신주쿠역 인근에는 이세탄, 다카시마야, 오다큐백화점 등 쟁쟁한 백화점들이 경쟁하지만, 고령 소비자를 타깃으로 삼은 곳은 게이오백화점이 유일하다. 특히 백화점 최상층인 8층 매장에는 '하트풀 플라자'라고 불리는 개호(介護·돌봄) 용품 전용 공간이 있다.
하트풀 플라자에 진열된 휠체어 종류만 10가지에 달하고, 지팡이, 보행기, 씹기 편한 유동식, 전동식 침대 등이 골고루 전시돼 있다. 쓰다듬으면 고양이 울음소리를 내는 반려인형, 활동하기 편하지만 패션도 놓치지 않은 의류도 판매한다. 성인용 기저귀 종류도 아기 기저귀만큼이나 다양하다. 노인 돌봄 용품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직원의 상세한 설명도 들을 수 있다.
제품뿐 아니라 공간도 고령자 친화적이다. 하트풀 플라자 한편엔 고객이 자리에 앉아 천천히 계산할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가 마련돼 있다. 백화점에서 상속, 유언, 재산 정리 등 노후 관련 상담 서비스를 고객에게 무료로 제공한다. 게이오백화점 관계자는 "하트풀 플라자를 운영한 지 30년이 넘었고 다른 백화점들도 개호 용품을 판매하는 공간이 있지만, 게이오백화점의 규모가 가장 크다"고 강조했다.
4층 여성 의류 매장은 유난히 할머니 고객이 많아 '백화점판 스가모 거리'를 연상케 한다. 70대 이상 여성들을 겨냥한 패션 브랜드가 모여 있고, 체구가 아주 작거나 큰 여성들을 위해 여러 브랜드의 큰 사이즈와 작은 사이즈만 모아 둔 매장도 있다. 노화 방지에 특화된 화장품 코너나 여성 노인들이 자주 쓰는 바퀴 달린 장바구니 브랜드 매장도 볼 수 있다.
한국 백화점의 1층에는 명품 매장이 들어서지만, 이 백화점 1층에는 고령자 전용 기능성 신발 구역이 있다. 착화감이 편하고 디자인과 색깔이 다양한 여러 기능성 신발을 판매하고 있어, 소비자의 선택지가 넓다.
게이오백화점의 멤버십 회원인 호소카와 도시코(81)씨는 "다른 백화점은 젊은 사람들이 많아 불편한데 이곳에 오면 내 연령대에 맞는 제품이 많아 계속 오게 된다"면서 "오늘 입은 옷과 신발도 모두 게이오에서 산 것"이라고 말했다. 기자와 백화점을 함께 방문한 다카하시 아케미 분쿄가쿠인대학 교수는 "80대인 친정어머니나 시어머니를 위한 물건을 살 때는 게이오백화점을 방문해야 선택지가 훨씬 많다"면서 "게이오백화점이 인구구조에 따른 시장 변화에 발맞춰 변화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의료 서비스 분야에서도 '친어르신' 환경을 조성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건강수명 증진 등 초고령사회 관련 분야를 연구하는 기관인 도쿄종합노인병원이 바로 그렇다. 진료실 찾기가 미로 찾기에 가까운 한국 종합병원과 달리, 도쿄종합노인병원은 큰 숫자와 선명한 색깔을 쓴 대형 안내판으로 환자들이 직관적으로 길을 찾도록 도와준다. 방사선학과는 17번 초록색, 혈액·소변 검사는 16번 흰색, 심장 관련 과는 12번 빨간색, 피부·비뇨기과 등은 13번 빨간색 등으로 표시해 길을 안내한다. 병원 로비 한쪽 벽에는 대형 내부 지도가 있어, 진료과의 번호와 색깔만 인지하면 비교적 쉽게 길을 찾을 수 있다.
높이가 낮고 둥근 안내데스크를 배치해 휠체어 사용자가 어디서든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 김영선 경희대 노인학과 교수는 "적절한 밝기를 유지하기 위해 여러 개의 조명을 활용하고, 휠체어가 이동할 수 있도록 통로도 상당히 넓게 만들었다"면서 "국내 병원이나 치매전담시설, 경로당 등에 적극적으로 적용해 볼 수 있는 사례"라고 강조했다.
<2회> 일본은 어르신 고객이 '왕'
▶알바생이 치매노인 관리까지... 日 편의점은 고령사회 비추는 '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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