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어머니들은 늘 가족의 그림자 역할만 해온 단역이었죠. 하지만 이젠 주연이 돼야 합니다. 한 분 두 분 사라지고 나면 그들의 숭고한 삶을 누가 기억할까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다큐멘터리 영화 ‘38년생 김한옥’을 연출한 채승훈(57) 감독은 9일 “주인공 김한옥은 이 시대의 모든 순간을 묵묵히 지켜 온 우리 모두의 어머니”라고 작품을 소개했다. 러닝타임 148분인 영화는 14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일반에 공개된다. 원래 이 영화는 지난해 5월 김한옥씨가 사는 충북 청주에서 시사회를 갖고 첫선을 보였다. 이후 김씨가 병마에 시달리다 5개월 만에 세상을 떠난 뒤, 투병 과정과 장례식을 담은 영상이 추가되면서 최근 완결판이 나왔다.
김한옥은 채 감독의 어머니다. 채 감독은 2011년부터 11년 동안 어머니의 모습과 일상을 직접 영상에 담았다. 그는 어머니에게 카메라를 처음 들이대던 순간을 생생히 기억한다.
“엄마가 저혈당으로 쓰러진 날이었어요. ‘이러다 갑자기 떠나시면 어쩌나’ 하는 급한 마음에 바로 촬영을 시작했습니다. 반대하는 가족들을 설득하는 게 쉽지 않았지요”
채 감독은 언젠가 꼭 어머니의 고된 인생사를 영화로 제작하고 싶었다. 그는 “우리나라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세계 속에 당당하게 선 데는 억척스럽게 역경을 이겨낸 어머니들의 희생이 있었다고 생각한다”며 “그런 ‘K마더’의 힘을 다음 세대에 알리는 작품을 남기고 싶었다”고 했다.
영화는 김한옥의 어린 시절 이야기로 시작한다. 지독히도 가난했던 한옥은 여섯 살 때부터 남의 논밭으로 일을 다녔다. 늘 배가 고팠고, 학교는 근처에도 못 가봤다. 새엄마의 혹독한 매질을 피해 간 시집에서는, 13명이나 되는 시댁 식구를 위해 밤낮으로 부엌일과 바느질을 해야 했다. 중년이 돼서도 고난은 멈추지 않았다. 남편은 뇌경색으로 쓰러졌고, 가장 믿었던 장남은 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래도 한옥은 쓰러지지 않았다. 묵묵히 가족을 위해 헌신했고, 6남매를 어엿이 키워냈다. 몸이 늙어 말이 안 들리고 정신이 오락가락해지자 한옥은 평생 안 쓰고 안 먹으며 모아 뒀던 금붙이를 녹여 가락지 6개를 만든다. 그리고는 시집간 세 딸과 세 며느리를 차례로 찾아 선물을 한다.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1938년생 김한옥’은 해외에서 먼저 주목을 받았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미국, 인도, 캐나다, 이탈리아 등 해외 각지 영화제에 출품해 최고 다큐멘터리상을 9차례나 연속 수상했다. 지난 8일에는 할리우드 독립영화제에서 다큐멘터리 부문 최고상을 거머쥐었다. 해외 영화계에서는 "세상 모든 어머니에 대한 헌사" "어머니의 시간이 문화와 언어의 장벽을 넘어 세계의 마음을 울렸다" 등의 호평을 쏟아내고 있다.
소식을 접한 국회가 “온 국민이 봐야 할 감동 실화”라며 제작사 쪽에 연락을 취해 이번 국회 상영이 성사됐다.
주인공 김한옥은 해외 영화제 수상이 이어지던 작년 10월 가족의 품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자식과 손주들은 장례식 때 들어온 조화(弔花) 꽃잎을 하나하나 따서 관에 뿌렸다. 이 장면은 영화계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작품 '꿈'의 마지막 장면과 오버랩된다. 구로사와는 채 감독이 가장 존경하는 영화 감독이다.
영화사 ‘예술로통하다’에서 연출을 맡고 있는 채 감독은 그동안 역사의식과 소수자를 다룬 작품을 만들어 왔다. 위안부 피해자 이야기를 다룬 연극 ‘치마’, 금속활자본 직지를 소재로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사랑을 그린 영화 ‘우리’ 등을 연출했다.
그는 “엄마는 ‘죽은 나무에도 1,000번의 물을 주면 살아난다’는 말씀을 입버릇처럼 하셨다”며 “우리 모두의 어머니인 김한옥을 통해 배워야 할 것은 무한한 사랑과 그 사랑에 대한 믿음인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