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등학교 5학년이 된 자녀를 둔 학부모 A씨는 최근 학교폭력(학폭) 뉴스를 볼 때마다 남의 일 같지 않다. 딸이 지난해 반 친구들의 괴롭힘에 시달린 적이 있어서다. 따돌림을 당하던 다른 친구에게 잘해줬다는 이유로 몇몇 아이들은 언어폭력을 가했다. 고민 끝에 A씨는 얼마 전 단추형 녹음기를 구매해 딸에게 줬다. 그는 “학교에서 늘 휴대하다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녹음하라 일러뒀다”고 말했다.
3월 개학을 맞아 자녀에게 ‘녹음기’를 사주려는 학부모가 부쩍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대면수업이 재개되면서 혹시 모를 학폭 피해에 대비해 가해자를 처벌하고 증거를 확보하기 위한 방편이다. 학폭 피해자의 복수극을 그린 넷플릭스 드라마 ‘더글로리’나 최근 불거진 정순신 변호사 아들 사태로 학폭 이슈가 재부상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8일 본보가 ‘네이버 데이터랩’의 항목별 쇼핑 클릭 추이를 확인해보니, 최근 1년간 ‘보이스레코더’의 월별 클릭 지수는 지난달 최고치를 찍었다. 최대 클릭수가 나온 올 2월을 100으로 놓고 월별로 비교해 보면, 뚜렷한 증가세가 확인된다. 지난해 12월 55가 찍혔는데, 전달(24)에 비해 두 배 이상 뛴 수치다. 더글로리가 막 방영해 인기몰이를 하던 시점이다. 올 1, 2월 역시 각각 86과 100으로 전월 대비 15%, 11% 증가했다.
가장 많이 검색된 품목은 ‘초소형 녹음기’와 ‘볼펜형 녹음기’였다. 클릭한 사람 55%가 여성이었고, 연령대는 40대가 가장 많았다. 녹음기 구매를 두고 초ㆍ중ㆍ고생 자녀를 둔 어머니들의 관심이 꾸준히 늘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실제 초소형 녹음기를 판매하는 한 업체 관계자는 “학폭이 계속 사회 문제가 되면서 개학 전보다 판매량이 10% 이상 증가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업체 관계자도 “가방이나 몸속 어디에 둬야 녹음이 잘되는지 문의하는 분들이 부쩍 많아졌다”고 했다.
휴대폰에도 녹음 기능이 있지만, 초소형 기기를 찾는 건 은밀히 증거를 수집해야 하는 학폭 특성과 무관치 않다. 학폭 피해 경험이 있는 고교생 자녀를 둔 이모(51)씨는 “친구들이 아이가 선생님과 원조교제를 한다는 거짓말을 들릴 듯 말 듯 자기들끼리 말하는 식으로 괴롭혔다”며 “가해 학생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녹음하려면 휴대폰으론 안 될 것 같아 볼펜형 녹음기를 사줬다”고 털어놨다.
녹음 자료는 학폭 소송 등 법적 분쟁에서도 유용한 증거로 쓰인다. 법무법인 오현의 나현경 변호사는 “학폭 사건은 진술 위주로 조사가 이뤄져 녹음 같은 확실한 물증이 있으면 큰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현행 통신비밀보호법상 당사자가 참여한 대화를 녹음하는 행위는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
다만 모든 녹음이 합법적이지는 않아 주의해야 한다. 법률사무소 선율의 박상수 변호사는 “녹음기를 교실에 두고 다른 친구들의 대화를 녹음하는 행위는 위법 소지가 있다”고 강조했다.
피해 학생이 직접 녹음기를 들고 다니며 증거를 확보해야 하는 세태가 정상은 아니다. 그만큼 학폭 폐해가 심각하다는 방증이지만, 녹음기 활용은 ‘최후의 보호 수단’이 돼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장경은 경희대 아동가족학과 교수는 “아동ㆍ청소년기는 타인과 관계 형성을 배워가는 중요한 시기”라며 “녹음기를 상시 구비하는 자체가 학교 생활을 위축시키는 건 물론 잘못된 타인상을 심어주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