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산업혁명의 배경에 16~18세기 ‘인클로저(Enclosure, 소규모 토지의 대규모 목장화)’가 있었듯, 식민지 조선의 산업화는 1912~18년 토지조사사업 이후 본격화했다. 저 사업으로 조선 농지 약 40%가 조선총독부와 일본인, 소수 조선인 지주에게 흡수됐고, 토지 점유-경작권을 박탈당한 농민이 급증하고 소작농 처우도 더욱 악화했다. 땅을 빼앗긴 이들 다수가 도시 변두리 임금노동자가 됐고, 1919년 3·1운동의 주된 동력 중 하나가 됐다.
3·1운동의 시대적 배경으로 주로 1차대전 직후 파리강화회담(1919.1.18)에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천명한 민족자결주의가 꼽히지만, 그건 ‘민족 대표’라 불리는 소수 민족주의 지식인들의 ‘배경’이었다. 총독부가 106만 명으로 집계한 조선 전역의 3·1운동 참가자(4월 11일까지) 대다수에게는 당장의 생계-생존이 더 절박했고, 조선 독립이 그 길이라 여겼다.
3월 1일 오후 탑골공원 독립선언서 낭독과 당일 학생들의 경성 도심 시위는 이틀 뒤 고종 장례식을 기점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됐고, 노동운동의 조직력과 결합하면서 실질적 파괴력을 얻었다. 3월 8일 총독부 직영 공기업인 용산인쇄소 노동자 200여 명이 야근을 거부하고 ‘조선 독립’을 외치며 거리에 나섰고, 다음 날 아침 일본 전매국 조선지사격인 총독부 직영 동아연초 조선제조소 인의동 공장(현 종로4거리) 노동자 500여 명이 파업- 만세시위에 동참했다. 그들은 그해 10월, 한반도 역사상 처음 ‘8시간 노동제’를 외치며 17일간 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당시 조선인 노동자들은 일인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급여를 받으며 하루 최대 16~18시간씩 일했다. 시인 김소월이 ‘사흘이나 굶은 거지는/ 스러질 듯 애닯은 목소리로/ 나리마님 적선합쇼, 적선합쇼’(‘서울의 거리’)라 쓴 게 1920년, 저 무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