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가도 가도 (뱃길) 끝이 없구만.'
전남 목포연안여객선터미널에서 쾌속선을 타고 가거도로 가는 내내 이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여객선은 최고 속도(시속 62㎞)를 뽐내며 물살을 갈랐지만 섬에 도착하는 데는 3시간 30분이나 걸렸다. 그사이 자다가 깨기를 서너 차례. 그때마다 객실 바닥에 깔개를 깔고 벌렁 드러누워 자는 승객들이 한두 명씩 늘었다. 객실 구석에 1인용 접이식 캠핑 매트리스가 비치돼 있는 이유를 뒤늦게 알고선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가거도는 큰마음을 먹고 가야 할 곳이었다. 배에서 만난 가거도의 한 주민은 "예전엔 목포에서 집에 가는데만 꼬박 1박 2일이 걸렸다"며 "그땐 목포항에서 가거도를 가는 배가 1주일에 한 번 떴고, 그나마도 흑산도에서 하룻밤 정박한 뒤 이튿날 가거도로 들어갔다"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고(故) 조태일 시인은 이런 가거도를 두고 '너무 멀고 험해서 오히려 바다 같지 않은, 거기 있는지조차 없는지조차 모르던 섬'이라고 했다. 하기야 6·25 전쟁 당시 가거도 주민들은 그 난리가 터진 것도 몰랐다고 하니 이 표현이 과한 건 아닐 터다.
우리나라 최서남단 해역에 위치한 신안군 흑산면 가거도. 중국의 닭울음소리가 들린다는 믿거나 말거나 속설을 지닌 이곳은 목포에서 직선거리로 148㎞, 뱃길로는 233㎞가량 떨어져 있는 '끝섬'이다. 섬 전체가 기암괴석과 후박나무숲으로 이뤄져 있고 인근 바다엔 난류와 한류가 교차하는 황금어장이 형성돼 있다. "가히 살 만하다"고 해서 가거도(可居島)다.
섬 식구라곤 308가구 424명. 대부분 바다에서 직접 잡은 고기를 손질해 팔거나 늦가을(11월)에서 이듬해 초봄(3월)까지 낚시꾼들에게 하룻밤 묵을 잠자리를 내주는 것으로 먹고산다. 눈앞에 물로 가득 찬 망망대해를 대하고 사는 가거도 주민들은 때 묻지 않은 섬처럼 사람을 좋아하고 넉넉한 인심을 지녔다.
그런데 최근 순박한 가거도 주민들이 단단히 뿔났다. 수년째 행정당국 등을 향해 생활 여건 개선을 촉구하고 있지만 나아진 게 거의 없어 생계마저 위협받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27일 오후 가거도에서 만난 주민들은 하나같이 "못살겠다"고 새된 목소리를 냈다. "목포~가거도 일반 항로에 투입된 여객선이 격일제로 운항한 지가 벌써 몇 년째인지 몰라요. 이 항로도 1일 생활권이 가능하도록 매일 오전 목포에서 여객선이 출항하도록 해달라고 선사나 당국에 얘기해도 묵묵부답입니다. 한마디로 가거도 주민들을 졸로 보는 것이죠." 가거도항에서 민박 '중앙정'을 운영하는 이희순(57)씨는 "목포항에서 격일제로 오전에 출항하는 배가 홀수날과 짝수날을 번갈아가면서 운항하는 바람에 헷갈려서 손님 예약도 못 받는 경우가 많다"고 목에 핏대를 세웠다.
가거도 주민들에게 교통수단은 단순히 이동권이 아닌 생존권과 직결돼 있다. 수산물 위판 시설이 없는 가거도에선 수협을 통한 계통 출하가 불가능한 탓에 어민들은 가거도 앞바다에서 잡아 올린 물고기를 직접 손질해서 택배 판매하거나 고기 손질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생계 수단인 가내 수가공 수산물 택배를 운송할 여객선이 주민들 생계에 직접 타격을 입히는 경제 구조인 셈이다.
그러나 선사 측은 코로나19 사태 직후 운항결손금이 지원되는 목포~가거도 준공영제 항로(매일 1회 운항)를 제외한 일반 항로에 대해선 수익성 악화를 이유로 격일제 운항을 이어가고 있다. 목포해양수산청 관계자는 "주민들은 코로나19 규제가 풀린 만큼 일반 항로 운항도 코로나 이전으로 되돌려달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선사 측은 승객 감소와 유가 급등 등을 이유로 일반 항로를 폐쇄하겠다고 맞서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격일제 운항으로 협의했다"고 말했다.
이에 또 다른 민박집을 운영하는 주민 정석규(66)씨는 "여객선 격일제 운항 탓에 보시다시피 손님도, 수입도 거의 없다 보니 매달 100만 원 이상 나오는 전기료를 어떻게 낼지 걱정하는 게 일이 됐다"며 "그런데도 당국은 선사 편만 들고 있어 주민들 사이에선 '공무원들이 선사 측으로부터 술을 몇 잔 얻어먹은 것 아니냐'는 뒷말까지 나온다"고 불신했다.
경남 지역의 20~30톤급 근해 연승어선들이 가거도 연안에서 근접 조업을 하는 것도 주민들 속을 발칵 뒤집어 놓고 있다. 2~5톤짜리 소형 어선으로 연안에서 자망 조업을 하는 가거도 어민들은 6~7척씩 선단을 이뤄 어족 자원을 거둬들이는 경상도 어선들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어서다. 어민들은 "가거도 인근 해역을 수산자원관리수면으로 재지정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수산당국은 어업 분쟁을 이유로 거부하고 있다. 현행 수산자원관리법 시행 규칙은 어업 분쟁이 있는 곳을 관리수면으로 지정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가거도 해역이 이에 해당한다. 전남도는 2010년 5월부터 5년간 가거도 연안에서 5~8㎞ 해역 7,063㏊를 수산자원관리수면으로 지정해 연안 어업과 기존 면허 어업, 구획 어업 외엔 조업을 할 수 없도록 했다. 이후 가거도 해역 조업 제한 조치에 반발한 경남 사천지역 어민들이 민원을 제기하는 등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가거도 어민 조운찬(70)씨는 "외지 배들이 남의 동네에서 물고기 씨를 말리고 토착민들의 생존권까지 위협하고 있는데도 당국은 뒷짐만 지고 있다"며 "이미 조업 경쟁력에서 뒤진 상당수 어민들이 선상 낚시 가이드로 업종을 바꿔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삶의 터전을 잃어가고 있는 주민들에게 가거도의 고질적 식수난은 또 다른 상실감으로 이어지고 있다. 신안군은 가거도 관정과 지표수를 이용해 하루 880톤의 물을 생산하고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해 1년 내내 제한 급수를 시행하고 있다. 이 때문에 가거도에선 집집마다 대형 물통이 설치돼 있고, 지표수를 끌어오는 호스가 전깃줄처럼 얼기설기 걸쳐 있거나 뒤엉켜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주민들은 "저수지나 대형 집수정 하나 만들어 달라고 입이 아프게 얘기를 해도 관(官)에선 귓등으로도 안 듣는다", "우리 보고 죽으란 말이냐"고 언성을 높였다. 고승권 가거1구 이장은 "언제까지 주민들이 지표수를 끓여 먹어야 하느냐"며 "제발 안정적인 물 공급을 해달라"고 말했다.
상황이 이쯤 되자 정이 많던 주민들도 "허울만 좋은 '올해의 섬' 타이틀을 가져가라"고 정부와 신안군을 직격했다. 정부가 1월 섬의 가치를 알린다며 가거도를 올해의 섬으로 선정하고, 신안군이 이를 계기로 대규모 가거도 축제와 200억 원 규모의 관광 인프라 확충 계획을 내놓자 "관이 주민들을 들러리로 세우려 한다"고 비판했다. 가거도항에서 고기 손질을 하던 김덕자(61)씨는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도록 해달라는 주민들의 민원을 번번이 묵살하면서 가거도를 올해의 섬으로 선정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경우냐"며 "관광 시설비로 수백억 원을 쏟아부을 게 아니라 사람부터 살게 해주는 것이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해야 할 일"이라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