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공' '정순신' '한동훈'… 민감한 수사는 일선 경찰서로 넘겨

입력
2023.03.04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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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할 배당, 일선도 수사 역량" 설명 불구
"일선에서 큰 사건 수사는 부담" 반론도 
책임 아래로 미루는 보신주의 원인 지적

"일선 경찰서 수사관이 정권과 가깝다고 알려진 인사를 제대로 조사할 수 있을까요."

3일 경찰의 한 고위 간부는 아들의 학교폭력(학폭)이 드러나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장에 임명됐다 낙마한 정순신 변호사 수사를 일선 경찰서가 맡게 된 것을 두고 "선뜻 이해가 안 간다"며 고개를 갸웃했다.

서민민생대책위원회는 지난달 27일 정 변호사를 허위공문서 작성 및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 방해 혐의로, 윤희근 경찰청장을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와 채용절차법 위반 등 혐의로 서울경찰청에 고발했다. 서울경찰청은 그러나 이 사건을 전날 서대문경찰서에 배당했다.

이처럼 정권의 유력 인사가 연루된 사건을 일선 경찰서에서 수사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사회적으로 관심이 높은 사건은 시도경찰청에서 직접 수사해온 관례에 비춰보면 이례적이다.

국회가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에서 위증한 혐의로 고발한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과 윤희근 경찰청장 수사도 올 초부터 서울 영등포경찰서에서 맡고 있다. 서울경찰청 반부패·공공범죄수사대가 맡았던 '시민언론 더탐사'의 한동훈 법무부 장관 스토킹 사건도 청담동 술자리 의혹을 수사하던 서초경찰서로 병합됐다.

시민단체가 김대기 대통령실 비서실장과 김용현 경호처장, 역술인 천공 등을 고발한 사건도 용산경찰서에 배당됐다. 하지만 한남동 관저 결정에 천공이 개입했다는 의혹을 제기한 김종대 전 정의당 의원과 부승찬 전 국방부 대변인 등을 대통령비서실이 고발한 사건은 서울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가 직접 수사하고 있어, 배당 기준을 두고 뒷말이 나온다.

서울청은 배당 과정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서울청 관계자는 정 변호사와 윤 청장이 고발된 사건이 서대문서에 배당된 이유에 대해 "경찰청이 서대문서 관할인 데다, 법리가 간단한 사건은 일선서에서도 충분히 조사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일선서에서 진상 규명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느냐는 우려도 적지 않다. 수사 경험이 풍부한 한 수사관은 "광역수사단도 유력 인사 소환이 쉽지 않은데 일선서에서 가능하겠느냐"고 반문했다. 광역수사단은 반부패·공공범죄수사대를 비롯해 금융·마약·강력범죄수사대 등 서울청 산하 4개 전문 수사대를 총괄하는 조직이다. 일선서 수사과장을 지낸 한 중간 간부도 "예민한 사건이 넘어오면 한숨부터 나온다"며 "선뜻 사건을 맡겠다고 나서는 직원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실제로 일선서에 수사를 맡겼다가 낭패를 본 사례가 적지 않다. 2021년 9월 대장동 사업 특혜 논란이 불거졌을 당시 용산서가 금융정보분석원(FIU) 첩보를 받고도 수개월 가까이 방치했던 사건이 대표적이다. 최관호 당시 서울청장은 국회 국정감사에서 “사안에 대한 경중 판단 없이 바로 (일선) 경찰서에 배당한 게 가장 큰 과오였다”고 시인했다. 일선 경찰서의 한 간부급 인사는 "잘해도 본전, 못하면 쪽박인 사건들은 일선서로 내려 보내는 것 같다"고 불만을 표출했다.

김도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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