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영수 서해연씨 부부는 82세 한 달 차이 동갑이다. 손 씨는 경북 의성에서, 서 씨는 이웃한 군위에서 태어나 스무 살에 결혼했다. 1961년에 결혼해 2021년이 결혼 60주년이었다. 지금도 어딜 나가면 꼭 손을 잡고 다닌다. 손 씨는 "넘어지면 병원비가 나가기 때문에 나만 손해" 라면서 너스레를 떨지만 의자에 앉아서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군에서 제대할 때가 제일 좋았지요."
팔십 평생을 살아오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묻자 아내 서 씨가 내놓은 대답이었다. 남편 손 씨의 대답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군대에 있을 때 홀로 고생했을 아내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짠하다”고 대답했다.
두 사람은 결혼한 지 1년도 안 되어서 이별을 해야 했다. 징집통지서가 날아온 것이었다. 입대하던 날 아버지가 읍내까지 마중을 나왔다. 막내아들을 싣고 가는 버스를 보낸 후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논두렁을 걸어 집으로 돌아갔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16주나 이어진 통신병과 훈련 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당시는 훈련병에게 우편물 자체가 전달이 안 돼 아버지의 부고도 듣지 못했다.
장례식은 첫 아이를 낳은 지 겨우 한달 지난 아내 서 씨가 도맡다시피 했다. 남편은 6남매 중 막내였다. 큰형님은 일본에 있어 연락이 안 되었고, 딸 넷 중 셋은 시집을 가 먼 곳에 있었다. 손 씨의 작은 누나와 서 씨가 빈소를 지켰다. 상주 없는 장례식이었다.
손 씨는 무선통신병으로 자대에 배치됐다. 중학교 즈음부터 독학으로 공학책을 사서 공부하다가 대구 동성로에 있던 '시민소리사'에 들어가 트랜지스터를 공부했다. 1년 정도 있다가 의성으로 옮겨 '의성시대소리사'에 기사로 들어갔다. 이런 이력으로 자연스럽게 무선통신병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통신병 차출 요(要)'
제대할 무렵 베트남 전쟁 파병이 시작됐다. 그때 부대로 전보 하나가 날아왔다. 무선통신병 파병 명령서였다. 첫 파병 즈음에는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컸고, 적군 저격병들이 장교보다 무전병을 노린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나중의 일이었지만, 실제 한국군 첫 전사자는 무전병이었다. 손 씨는 베트남에 가면 100% 죽는다는 생각에 받은 전보를 책상 서랍에 숨기고 보고하지 않았다. 영창을 갈지언정 파병을 피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집사람 얼굴도 아른거리고, 태어난 아이 얼굴도 눈에 밟히고 해서 도저히 파병은 안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건 본부에서 제가 은폐한 명령 전문에 대한 후속 조치가 전혀 없었다는 거예요. 최소 영창까지 각오했는데, 마치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그냥 넘어갔거든요. 지금 생각해도 미스터리입니다."
제대 후 군위에 '시대소리사'를 차렸다. 살림은 가게에 딸린 작은 방에서 했다. 군위에서 처음으로 텔레비전을 판매했다. 1970년 즈음이었다. 당시 배터리를 연결해서 작동시킬 수 있는 텔레비전이 폭발적인 인기였다. 전기가 들어가지 않는 곳이 많았던 까닭이었다.
80년 즈음에 엉뚱하게 운수업에 뛰어들었다. 친구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화물회사를 물려받아 운영했다. 택배가 없던 시절이라 화물업이 인기가 있었다. 8년쯤 경영하다가 용달차 다섯 대를 할부로 사서 용달회사를 차렸다. 군위의 농산물을 전국으로 운송하는 사업이었다. 당시만 해도 군위 사과가 서울에서도 알아주던 시절이었다. 서울, 부산 등으로 용달차를 보냈다.
그러다 1990년 무렵에 군위에 문 닫는 고아원을 하나 인수했다. 6.25 전쟁 후 넘쳐나던 전쟁고아들이 모두 성장하면서 고아원이 더 이상 필요 없어진 까닭이었다. 고아원은 620평이었다.
고아원을 리모델링해서 7채 건물의 다세대 주택으로 만들었다. 손 씨가 직접 리모델링을 했다. 싱크대까지 놓았다. 당시에 싱크대 놓고 세를 놓은 집이 처음이었다. 18가구가 들어왔다. 대부분 관공서에서 일하는 이들이었다. 거기서 나온 세를 받아서 6남매를 공부시켰다.
자녀들 모두 군위에서 초중고를 다 졸업시켰다. 큰 딸과 둘째 딸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각각 군청과 농협에 들어갔고,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대학을 보냈다. 한꺼번에 대학생 네 명이 있던 적도 있었다. 다행히 다들 공부를 잘해서 장학금을 척척 받아왔다. 셋째는 경북대 사대 국어교육과에 수석으로 입학했는데 학교에서는 장학금을, 새생활육성장학재단에서는 면학비를 받았다. 손 씨는 "아내가 고생이 많았다"면서 "회사에서 경리 겸 창고지기 역할을 하고 아이들까지 돌보느라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살았다"고 말했다.
"새벽에 일어나 도시락을 다섯 개씩 쌌으니까요. 그야말로 하루하루가 강행군이었던 시절입니다."
1997년에 고아원 건물을 모두 헐고 그 자리에 빌라를 세웠다. 부부가 고생 끝에 드디어 번듯한 '건물주'가 된 순간이었다.
"정말 맨손으로 출발해 아등바등 이만큼 왔어요. 여기저기 돈을 빌리러 다닐 때도 많았고 여행 한번 못 갔지요. 자식들 모두 교수다, 어디 어디 장이다 해서 모두 자리를 잡았고 우리 부부는 늘그막에 '건물주'라는 소리를 듣고 있어요. 이만하면 잘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서 씨의 감회도 남달랐다.
"벌써 60년이 훌쩍 넘은 일인데, 지금도 제대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남편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얼마나 반갑고 기쁘던지요. 임신한 아내를 두고 입대했던 남편이 얼마나 마음을 끓였을까. 새삼 측은한 마음도 들구요. 산후조리도 못 한 상황에서 아버님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또 얼마나 황망했던지 모릅니다. 신혼 초의 그 애틋한 마음들이 지금까지 부부의 정을 끈끈하게 만든 뿌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행복 오래도록 누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