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산설에 휩싸였던 미국 '퍼스트리퍼블릭 은행'이 대형 은행들의 긴급 유동성 지원으로 일단 한숨을 돌리게 됐다. 하지만 미국의 중소형 은행을 향한 시장의 불안감은 가시지 않고 있다. 일회성 자금 수혈로는 이미 바닥난 신뢰가 금세 회복되기 어려운 데다, 기준금리 인상에 따른 유동성 위기도 한동안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한 탓이다.
16일(현지시간) 뱅크오브아메리카(BOA) 등 미국 대형 은행 11곳이 퍼스트리퍼블릭에 총 300억 달러(약 39조 원)를 예치한다고 발표한 뒤, 뉴욕 증시에서 이 은행 주식은 전날보다 9.98% 상승한 34.27달러(4만4,979원)에 거래를 마쳤다. 장 초반 은행 파산설이 부상하면서 주가가 36% 가까이 폭락하기도 했으나, 긴급 유동성 지원 소식에 급반등한 것이다.
하지만 시장은 여전히 불안한 모습이다. 장 마감 후 퍼스트리퍼블릭의 주가는 시간 외 거래에서 다시 20% 폭락했다. 단 하루 동안 주가가 급등락하는 롤러코스터 장세를 보인 것은 이 은행에 대한 시장의 불안 심리를 고스란히 반영한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주된 원인은 중소형 은행에 대한 신뢰 부족이다. 300억 달러의 유동성 수혈로 당장 급한 불은 껐음에도, 은행 불신에 따른 뱅크런(예금 대규모 이탈) 사태를 막을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더구나 미국 중소형 은행들의 유동성 위기가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고강도 긴축에 따른 부작용인 만큼, 다른 중소형 은행의 추가 부실 사태 역시 언제든 발현할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도 미 대형 은행들의 긴급 유동성 지원이 사태 해결의 근본적 해결은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대형 은행들이 지원하는 자금 재원이 대부분 중소형 은행에서 인출된 예금이라는 점에서, 사실상 '아랫돌 빼서 윗돌을 괴는' 임시방편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중소형 은행에 대한 시장의 평가도 갈수록 냉정해지고 있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퍼스트리퍼블릭에 대해 "심각한 예금 유출 위기에 직면해 있다"면서 신용등급을 종전 'A-'에서 투기 등급인 'BB+'로 4단계나 한꺼번에 낮췄다.
심지어 미국의 은행 산업 전체에 대한 불신도 커지고 있다. 블룸버그통신과 WSJ는 SVB 붕괴 이후 미 은행들이 1주일 동안 연준으로부터 1,648억 달러(약 216조 원)를 빌렸다고 보도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대 규모의 차입금으로, 뱅크런 대비를 위한 조치라 해도 미국 은행 시스템의 취약성을 보여준 것이라는 게 매체들의 진단이다.
그렇다고 정부가 시장 불안을 잠재우려 '구제금융' 카드를 꺼내기도 쉽지 않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 공적자금을 투입해 은행들을 살렸다가, '혈세 낭비'라는 국민적 비판에 직면해 운신의 폭이 넓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탓에 민간은행들의 이번 긴급 자금 수혈도 미국 정부가 뒤에서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닛 옐런 재무부 장관이 제이미 다이먼 JP모건 최고경영자(CEO)와 자본 투입 방안을 논의했으며, 다이먼 회장이 다른 대형 은행들을 설득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퍼스트리퍼블릭 경영진이 주가 폭락 전 1,180만 달러(약 154억 원)에 달하는 주식을 대거 팔아치운 것으로 드러나면서 비판도 거세지고 있다. 지난 10일 파산한 SVB의 그레그 베커 회장도 주가 급락 전 360만 달러(약 50억 원)의 주식을 매각해 은행 경영진의 도덕적 해이(모럴 해저드) 논란을 촉발시켰다. 미 법무부와 증권거래위원회(SEC)는 SVB 파산 직전 이뤄진 경영진의 주식 매도 행위에 대해 조사할 방침이다.
한편 SVB의 모기업 SVB파이낸셜그룹이 결국 미 당국에 파산보호를 신청했다고 17일(현지시간) 블룸버그가 보도했다. 파산보호는 법원의 승인을 받아 기업의 채무이행을 일시 중지시키고 자산매각을 통해 기업을 정상화하는 절차로, 한국의 법정관리와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