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6일 오후 인천 미추홀구 관교동 터미널사거리.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는 시민들 머리 위로 '불체포 특권 폐지, 민주당은 빼고?', '이게 실화냐, 쌀 생산량 줄이려고 수확량 많은 벼 퇴출?'이라고 적힌 현수막들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다. 도보로 20분 떨어진 남동구 구월동 길병원사거리 주변은 더 어지러웠다.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 정의당, 진보당, 우리공화당 등 원내·외 정당에서 붙인 현수막 10여 개가 교통신호기와 가로수마다 걸려 있었다. 선거철에나 볼법한 광경에 지나가던 한 시민은 "구청에서 단속도 안 나오나"라며 얼굴을 찌푸렸다.
정당 현수막을 신고·허가·금지·제한 없이 걸 수 있도록 한 옥외광고물법 개정안이 시행된 지 두 달여 만에 전국 거리가 무차별적으로 내건 정당 현수막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도시 미관을 해칠 뿐만 아니라 상가 간판과 교통 표지판, 이정표를 가려 상인과 시민들의 불편이 커지고 있다. 시민들이 현수막 끈에 목이 걸려 다치는 사고까지 발생해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지난달 13일 오후 9시쯤 인천 연수구 송도국제도시의 한 사거리에서 전동킥보드를 타던 20대 대학생 A씨가 현수막 끈에 목이 걸려 넘어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야간에 가로수에 낮게 설치된 현수막 끈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A씨는 목 부위에 13㎝ 정도의 찰과상을 입었고 왼쪽 턱에 멍까지 생겼다.
A씨 가족은 1일 한국일보 통화에서 "딸이 인도가 아니라 차도 쪽으로 넘어져 차량과 부딪혔다면 더 큰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면서 "병원에서 '흉이 남을 수 있다'고 할 만큼 큰 상처를 입었는데, 철거된 지 2,3일 만에 같은 자리에 같은 정당 현수막이 또 걸렸다"고 말했다.
시민들 민원이 이어지면서 지방자치단체들도 대책 마련에 나섰다. 서울시는 다음 달 중으로 정당 현수막 가이드라인을 마련할 예정이다. 특히 현수막 개수와 표시·설치 사항을 지자체에 위임하고 글씨 크기와 표시 개수, 금지 장소 등을 구체화하는 옥외광고물법 개정안을 건의하기로 했다. 시는 정당 현수막 설치가 통상적 정당 활동 범위에 속하는지 여부에 대해서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에 유권해석을 요청했다.
인천지역 군수·구청장협의회도 지난달 전국 최초로 정당 현수막 규격 등 세부 기준 마련을 요구하는 공동건의문을 채택했다. 이재호 연수구청장은 "(현수막 관련) 법 개정에 따른 부작용과 그 책임이 고스란히 지자체로 넘어오고 있다"며 "정당 활동 보장 이상으로 시민들의 안전과 권리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선관위가 정치적 의사 표현을 폭넓게 보장하는 방향으로 공직선거법 개정을 추진 중이고,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있는 정치권도 현수막 설치 제한 움직임에 난색을 보이고 있다. 이 때문에 현수막의 표시기간(15일 이내)이라도 제한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연수구 관계자는 "정당 현수막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과 민원 해소에 적지 않은 행정력이 낭비되고 있다"며 "시민 안전까지 위협하고 있는 만큼 최소한의 규제는 필요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