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M엔터테인먼트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드러난 창작 권력 쏠림의 부작용을 막기 위해 K팝 기획사들은 블라인드 추천 제도나 독립적 음악 위원회를 꾸려 콘텐츠를 관리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창업자 등의 개인적 관심사에 휘둘려 콘텐츠가 좌지우지되는 걸 방지하려는 안전장치들이다.
K팝과 한류를 이끄는 남녀 아이돌그룹을 모두 배출한 A 기획사는 곡을 선택할 때 반드시 블라인드 과정을 거친다. 기획사에 들어온 미발표 음원이나 노랫말의 창작자 이름을 모두 가리고 가수와 A&R(Artist and Repertoire·음악 기획)직원 등 다수의 선택을 받아야 곡이 제작되는 방식이다. 소속 가수가 직접 만든 음원이나 가사도 아티스트의 이름을 뺀 채 블라인드 테이블에 올린다. 이 기획사 고위 관계자는 "창작에 이해관계가 얽히는 것을 막기 위한 방법"이라며 "MZ세대 직원들은 기획사 대표가 특정 곡에 긍정적 의견을 내도 '아티스트와 너무 어울리지 않는다' '이 노랫말이 말이 되느냐'는 식으로 거침없이 의견을 내고 있다"고 말했다.
SM과 함께 K팝 1세대 기획사인 JYP엔터테인먼트는 '박진영 1인 중심 창작 체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음악선곡위원회를 꾸렸다. 제작과 마케팅 등 부서별로 1명씩 뽑은 직원들과 본부장 그리고 가수 등이 투표를 거쳐 앨범 타이틀곡 등을 정한다. JYP 소속 모든 가수의 앨범 타이틀곡뿐 아니라 안무와 뮤직비디오 제작까지 총괄하던 박진영의 권한 대부분이 회사로 옮겨간 것이다. JYP 고위 관계자는 "특정 인물 중심이 아닌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회사를 만들기 위해 시도한 변화"라고 말했다.
JYP는 2013년까지 수년간 적자로 고전했다. 박진영이 공들인 소속 가수들의 미국 진출 계획이 2008년 리먼 브러더스 파산으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 위기로 전면 무산돼 한때 JYP는 파산 위기까지 몰렸다. 체질을 바꾼 JYP는 이날 기준 시가총액 2조7,000억 원을 넘어섰다. 2017년 시총이 1,500억 원대였던 것과 비교하면 18배나 커졌다. 김상화 음악평론가는 "JYP는 '탈(脫)박진영' 시스템이 자리 잡은 뒤 음악의 다양성이 넓어져 팬덤을 확장했다"며 "권력 분산과 멀티 프로듀싱 체제는 K팝 기획사들이 고민해야 할 변화의 화두"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