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님 상의와 데님 하의를 함께 입은 '청청 패션'과 허벅지 바깥쪽으로 큰 주머니가 달려 '건빵바지'로 불리는 카고팬츠, 두꺼운 소재와 커다란 패치 포켓이 특징인 초어(chore) 재킷, 보머 또는 항공점퍼로 불리는 허리 길이의 재킷과 상의와 하의가 하나로 붙은 점프슈트까지.
가을, 겨울의 유행 경향을 미리 선보이는 세계 4대 패션위크가 미국 뉴욕, 영국 런던, 이탈리아 밀라노를 거쳐 다음 달 7일 프랑스 파리에서 마침표를 찍는다. 이번 패션쇼를 통해 주요 패션 브랜드가 쏟아낸 주요 키워드 중 하나는 워크웨어(Workwear), 즉 작업복 패션이다.
20세기 초 미국과 유럽에서 육체 노동을 하던 이들이 입는 옷에서 유래한 워크웨어는 작업의 능률을 올리기 위해 입었던 기능성 의류였다. 최근 몇 년 새 패션업계에서 떠오른 워크웨어는 이 같은 작업복의 디테일을 일상복에 활용한 의류다. 큼지막한 주머니가 달린 카고팬츠가 대표적이며, 광부의 작업복에서 태동한 데님 소재의 활용도 두드러진다.
외신들이 패션업계의 '집착(obssession)'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워크웨어의 부상은 뚜렷한 패션계의 흐름이다. '세기 말 감성' Y2K 패션 부활의 한 단면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하이 패션(고급패션)과 스트리트 패션, 젠더 등 경계를 두지 않는 '보더리스 패션' 트렌드와 더 깊게 맞물려 있다. 성별이나 신체 치수에 구애받지 않는 범용성을 갖춰 젊은 소비 주체인 Z세대 사이에 호감도가 높다. 차이와 차별을 드러내지 않는 민주적 패션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워크웨어의 부상은 코로나19를 계기로 재택근무 등이 일상화되면서 '편한 옷'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과 관련이 깊다. 시간·장소·상황(TPO)에 따라 달리 입어야 하는 엄격한 드레스 코드의 허용 범위가 넓어졌고 자연스럽게 하이 패션에서 워크웨어를 수용하기 시작했다.
카고팬츠의 경우 지난해 가을 열린 봄 여름 패션쇼에서 디오르, 미우미우, 코페르니, 디젤 등의 브랜드가 여성 카고팬츠를 무대에 올린 데 이어 이번 패션위크에서는 지방시, 드리스 반 노튼 등의 남성용 카고팬츠가 눈에 띄었다. 여성용은 새틴, 데님 등 다양한 소재로 변주되면서 하이 패션 아이템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했다. 카고팬츠의 주머니 디테일은 팬츠뿐 아니라 상의와 치마에도 적용되고 있다.
1980년대의 상징과도 같았던 데님셋업, 즉 '청청패션'도 런웨이에 등장했다. 프라다가 지난해 가을 밀라노에서 선보인 2023 봄 여름 컬렉션은 1950년대 데님 스타일을 구현했다.
디자이너 브랜드들이 워크웨어 또는 워크웨어에 기반한 캐주얼 브랜드와 협업하는 것도 중요한 흐름이다. 지난달 파리 패션위크의 사카이 컬렉션에는 나이키, 워크웨어 브랜드 칼하트윕(WIP)과의 협업이 포함됐다. 구찌는 온라인 콘셉트 스토어 볼트(Vault)를 통해 100년 역사의 워크웨어 브랜드 디키즈와의 협업 제품을 선보였다.
이 같은 패션 컬렉션의 흐름에 국내 소비자들도 부응하고 있다. 종합 패션 플랫폼인 패션플러스에 따르면 워크웨어를 재해석한 '아메리칸 캐주얼' 범주의 제품 판매가 최근 부쩍 늘었다. 지난 한 해 아메리칸 캐주얼의 기본 아이템인 스웨터 매출은 전년 대비 106% 늘었고 후드와 맨투맨도 84%나 뛰었다. 니트와 아노락 점퍼도 각각 32%, 28%의 매출 신장세를 보였다.
작업복 브랜드 시장도 새롭게 열리고 있다. 도매를 중심으로 단체복이 주를 이뤘던 국내 워크웨어 시장에 대기업들이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지난해 가을 삼성물산 패션부문이 1995년 엠비오 이후 27년 만에 론칭한 남성복 브랜드 시프트G는 유틸리티 워크웨어(기능성 작업복) 콘셉트를 지향한다. 수납공간이 넉넉한 카고팬츠와 셔켓(셔츠와 재킷의 합성어), 초어 재킷(작업복 스타일의 재킷) 등으로 구성됐다. 코오롱FnC는 2020년 온라인으로 선보인 워크웨어 브랜드 볼디스트가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5개의 오프라인 매장을 열었고 연말까지 10개로 늘릴 계획이다. 박세진 패션 칼럼니스트는 "잇단 대기업의 작업복 브랜드 출시는 워크웨어 패션이 생각보다 오래 지속될 흐름이라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워크웨어의 인기를 포멀하고 클래식한 디자인이 지고, 캐주얼한 스타일이 떠오른 것으로 단순히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하이 패션과 스트리트 패션, 젠더와 스타일의 경계 없이 차별화된 소재와 디테일을 사용한 점이 워크웨어의 인기 비결이라는 설명이다. 임지연 삼성패션연구소장은 "Z세대가 워크웨어를 선호하는 본질은 특정 성별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신체 사이즈에도 대응할 수 있는 점"이라며 "편안하면서 스타일리시하고 넉넉한 핏으로 다양한 체형을 커버할 수 있는 장점이 부각되면서 앞으로도 큰 인기를 얻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더욱이 워크웨어의 패션위크 점령은 단지 겉보기만으로 하이 패션과 스트리트 패션을 구분하지 않는 패션계 동향과도 관련돼 있다. 평범해 보이는 외관 뒤에 숨겨진 장인정신과 기술적 요소가 브랜드를 명품으로 인정받게 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지난해 가을 밀라노에서 열린 봄 여름 보테가 베네타 패션쇼에서는 체크 패턴의 셔츠와 청바지 차림을 한 슈퍼모델 케이트 모스의 등장이 화제가 됐다. 평범한 외관과는 달리 셔츠는 12번의 프린트를 덧입힌 가죽 소재로 고도의 기술이 적용된 아이템이었다. 임 소장은 "이제는 캐주얼하냐 포멀하냐로 하이엔드 패션을 나눠보는 것이 아니라 장인정신과 테크닉이 적용된 부분을 가치 있는 것으로 보는 경향이 더 강화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워크웨어는 부와 지위를 표현하는 과시적 소비를 초월한 패션이다. 가령 워크웨어 트렌드의 중심에 있는 청바지는 오랫동안 사회적 지위와 나이, 성별을 가리지 않는 민주적 패션 아이템으로 사랑받아 왔다.
최근 뉴욕타임스(NYT)는 뉴욕 패션위크를 종합하는 기사에서 라틴계 미국 디자이너 라울 로페즈의 브랜드 루아르(Luar)와 뉴욕 패션위크에 데뷔한 헤론 프레스톤을 예로 들어 하이 패션의 개념이 바뀌고 있다고 짚었다. NYT는 '우아한 거리 패션'의 타이틀을 붙인 로페즈의 패션쇼에 대해 "새로운 상류사회의 제복을 만들고 싶어 한다"고 평가했다. 프레스톤 역시 뉴욕시 청소부 유니폼 디자인을 맡아 화제가 된 스트리트 패션에 기반한 디자이너다. NYT는 이처럼 하위문화나 작업복이 하이 패션의 영역으로 편입되고 있는 경향에 대해 "옷이 전하는 부와 지위의 상징이 재정의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말하자면 워크웨어의 유행은 패션으로 부와 지위를 과시하는 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보여주는 한 단면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