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와 황폐화'. 지난 1년간 우크라이나 의료 시스템에 대한 러시아의 무차별적 공격은 이 문구로 요약할 수 있다. 러시아군의 주된 표적은 ①병원 ②구급차 ③의료 물품 ④의료인이었다. 병원인 줄 알면서도 러시아군은 드론 공습을 감행했다. 우크라이나 동부 루한스크주(州)의 한 병원은 10번이나 반복된 공격을 받았다.
그 결과, 우크라이나 병원 10곳 중 1곳이 파괴됐다. 주민 3명 중 1명은 의료사각지대에 놓였다. '반인륜적 전쟁 범죄'라는 국제적 비난에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민간인 살상을 멈추지 않고 있다.
21일(현지시간) 공개된 국제기구의 최신 보고서에 따르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난해 2월 24일부터 같은 해 12월 31일까지 우크라이나 전역의 약 2,500개 병원 중 218곳이 292차례의 공격을 받아 파괴된 것으로 조사됐다. 10곳 중 1곳(약 9%)꼴이다. 피해는 수도 키이우와 최전선인 동부 하르키우·도네츠크·루한스크·헤르손주에 집중됐다.
'파괴와 황폐화'라는 제목의 이 보고서는 '인권을 위한 의사회(PHR)' '인시큐리티 인사이트' '잔혹행위의 목격자' '인권을 위한 미디어 이니셔티브(MIHR)' '우크라이나 의료센터(UHC)' 등 5개 비정부기구(NGO)의 공동 작업물이다. 러시아군의 우크라이나 의료 인프라 공격 전반을 분석하고, 지도화한 최초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러시아군은 개전 이후 35일간 하루도 빠짐없이 의료시설을 콕 집어 공격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침공 첫 2주는 일일 평균 4, 5개의 병원이 폭격에 시달렸다. 구급차(65건)나 약국·혈액센터 등 의료 시설(181건) 등에 대한 공격까지 합치면 지난해 총 707번에 달한다. 숨진 의료인만 62명이고, 체포되거나 인질로 잡힌 사례도 부지기수다. 러시아군이 짓밟은 지역에선 의료 물품도 남아나지 않았다.
보고서는 "분명 고의적 공격"이라고 못 박았다. 남부 미콜라이우주 바슈탕카에서 유일한 병원은 지붕에 적십자 마크가 크고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는데도, 러시아군의 공습을 피하지 못했다. 병원 책임자인 알라 바르세히안 박사는 "지붕 위로 날아온 러시아 드론은 이곳이 병원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미국 CNN방송에 말했다.
동부 요충지인 루한스크주 세베로도네츠크의 한 병원은 3개월에 걸쳐 10회나 공격받았다. 하르키우의 또 다른 병원들도 각각 5번과 4번을 습격을 당했다. '일부러 병원을 노린 공격'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유엔 국제이주기구(IOM) 조사 결과를 보면, 지난해 12월 당시 의료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는 우크라이나인은 3명 중 1명에 달했다. 마리우폴의 경우, 의료시스템의 80%가 붕괴됐다. 파블로 코프토니우크 전 우크라이나 보건부 차관은 "(전쟁이) 우크라이나에 끼친 암묵적 건강 손실이 막대하다"고 말했다.
병원을 표적으로 공격하는 건 '전쟁범죄'로 간주된다. 보고서 공동 저자인 크리스티나 빌럼은 "러시아군의 의료서비스 공격에선 민간인 살상의 규모와 무차별적 폭력이 두드러진다"며 "인도주의에 기반한 국제법상 금지되는 전쟁의 방식을 분명히 확인했다"고 비난했다. '인권을 위한 의사회' 연구책임자인 크리스티안 드 보스도 "이런 공격은 물리적 피해를 본 후에 장기적 영향을 미친다"며 "필요한 치료와 필수의약품에 대한 접근성을 낮춰 인구를 전반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든다"고 설명했다. 이번 보고서는 러시아의 전쟁 범죄를 입증할 증거로 이번 주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제출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