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사상 최대 영업이익을 기록한 정유사에 정치권이 '횡재세' 도입을 추진하는 데 이어 정부가 12년 만에 휘발유 도매가격 공개를 재추진하면서 정유업계에 비상이 걸렸다. 정유업계는 '영업 비밀 침해'라고 반발하지만, 주무부처 산업통상자원부는 "영업이익을 침해했을 때 공익적 가치를 비교해 봐야 한다는 게 대법원 판례"라며 유류 도매가 공개를 자신하고 있다.
21일 국무총리실 산하 규제개혁위원회에 따르면 경제1분과위원회는 24일 산업부가 추진 중인 '석유 및 석유대체연료 사업법 시행령 개정안(석대법)'에 대한 심의를 진행한다.
개정안은 현재 공개 중인 전국 평균 주유소 휘발유‧경유 도매가를 광역시·도 단위로 나눠 자세하게 공개하는 게 핵심이다. 지역별 가격을 주, 월 단위로 판매량과 함께 산업부 장관에게 보고하는 내용도 포함했다. 유류 도매가격 공개는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9년 산업부(당시 지식경제부) 규제개혁위원회를 통과했지만 2년 동안 총리실 규개위에 안건으로 상정되지 않았다. 산업부 관계자는 "당시 알뜰 주유소, 유가정보서비스 '오피넷' 등 석유 시장 관련 정책이 잇따라 나오면서 도매가 공개 논의에 앞서 일단 앞선 정책들의 경과를 지켜보자는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정부가 유류 도매가격 공개를 다시 추진하는 건 석유 시장 모니터링 기능을 높여 석유 가격을 안정화하기 위해서다. 정부가 2021년 11월부터 휘발유에 부과하는 유류세를 단계적으로 낮췄지만, 주유소 소매가격에 반영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려 서민들이 체감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많이 나왔다. 지역별 도매가가 알려지면 정부 정책 시행 후 곧바로 휘발유 가격을 낮추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산업부 관계자는 "일각에서 유류세 인하분이 정유사와 주유소 마진으로 일부 흡수됐다는 주장이 나온다"며 "석유 가격 공개 범위를 넓혀 주유소의 가격 협상력을 높이면 휘발유 소매가를 안정화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의 움직임에 정유업계는 반발하고 있다. 대한석유협회, 한국석유유통협회, 한국주유소협회는 지난달 6일 국무조정실에 "개정안 취지와는 달리 경쟁사의 가격정책 분석이 가능해져 오히려 경쟁 제한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취지의 공문을 보냈다.
우선 정유사가 주유소에 파는 도매가는 기업의 영업 비밀이라는 주장이다. 한 정유사 관계자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정유업계는 완전 경쟁 시장이 됐다"며 "민간 자율 경쟁이 이뤄지는 상황에서 영업 비밀을 공개하라는 건 경쟁하지 말란 것과 같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그는 "정유사들의 원가 절감 노력도 줄어들 것"이라고 덧붙였다. 석유사업법 제38조 2항이 '영업 비밀을 침해하지 아니하는 범위에서' 판매 가격을 공개하도록 규정하고 있어 시행령 개정안이 상위법과 어긋난다는 지적도 나온다.
주유소가 특정 정유사 제품을 써야 하는 국내 현실에서 휘발유 도매가 공개가 평균 가격을 더 올릴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석대법 시행령 개정이 논의된 2011년 에너지경제연구원은 전국 휘발유 도매가 평균 공개 전후를 비교 분석한 보고서에서 "유통 과정의 가격 투명성을 높여 공급자 사이의 가격 경쟁이 촉진돼 국내 석유제품 가격 인하가 기대된다"면서도 "과점 체제인 국내 석유시장의 특징으로 인해 가격이 상향 평준화될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의 움직임에 소비자단체는 환영하고 있다. 에너지 소비자단체인 E컨슈머 이서혜 연구실장은 "도매가를 공개하면 가격 담합 가능성이 있다는 정유업계 주장은 오피넷 개설 때도 내세웠던 논리"라며 "지역별 도매가가 공개되면 유류세 인하 후 주유소 소비자 판매가에 얼마나 빨리 반영되는지 세부 분석이 가능할 것"이라고 기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