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중매 핀 산골 매화마을에 '외인구단'이 등장한 이유

입력
2023.02.22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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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 울진 금강송면 불영계곡과 매화면 이현세만화거리

바람 끝이 차지만 곧 봄이다. 남녘에서부터 꽃 물결이 번질 날이 머지않았다. 이 무렵이면 으레 섬진강 하류 광양이나 하동의 개화 상황이 궁금해지는데, 올해는 전혀 엉뚱한 곳에서 매화를 영접했다. 그것도 눈 속에 붉은 꽃잎을 터트린 설중매다. 경북 울진에 매화면이 있다. 바닷가에서 고개 하나 넘어야 나오는 산골마을이다.


매화마을 점령한 ‘공포의 외인구단’

꽃 이름을 정직하게 행정지명으로 쓰는 곳이 매화면 말고 또 있을까. 유서 깊은 사연이 있나 싶지만, 딱히 그렇지도 않다. 매실단지로 유명하다는 단순한 이유로 2015년 원남면에서 매화면으로 개칭했다. 읍내에서 먼 남쪽 동네라는 지명이 썩 내키지 않았던 듯하다.

지명을 고치려니 최소한의 근거가 필요하다. 면 소재지는 이전부터 매화리였다. 마을 모양이 매화꽃이 떨어진 형국이라는 설이 등장한다. 조선 광해군 때 강원도관찰사 기자헌이 이곳을 지나다 해당화가 만발한 모습을 보고 ‘야다강매(野多江梅)’라는 시를 읊은 연유로 매야(梅野)라 하다 매화로 바뀌었다는 설도 있다. 선조 때는 파평 윤씨 집성촌인 마을에 영양 남씨 규수가 시집오면서 고향 영덕군 매일동의 ‘매(梅)’자를 따서 그리 불렀다고도 전한다. 이 정도면 고목(古木) 몇 그루는 있을 법한데, 오래된 나무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마을로 들어서면 가로수부터 매화나무다. 간간이 백매화가 섞여 있는데, 홍매화가 대부분이다. 지난 16일 매화면 가로수는 이미 꽃망울을 터트리고 화사한 봄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전날 30㎝ 가까운 폭설이 내려 산과 들, 냇가가 온통 순백인데, 진분홍 꽃잎이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근 10년 만의 폭설이라 마을에선 쌓인 눈을 치우느라 분주하고 여행객은 들뜬 모습이다. 3월까지 눈이 자주 내린다니 설중매를 볼 기회가 몇 차례는 더 남은 셈이다.

마을 안길로 들어서면 또 하나의 반전이 기다린다. 골목 초입 농협창고 외벽에 만화 주인공의 전신이 커다랗게 그려져 있다. 이현세 작가의 ‘공포의 외인구단’ 등장인물이다. 농구계에 ‘슬램덩크’가 있다면 야구계에는 ‘공포의 외인구단’이 있다. 아이들이나 보는 만화를 성인도 즐기는 오락거리로 끌어올린 작품, 스포츠를 매개로 사회적 약자의 좌절과 희망을 그린 시대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곳부터 낮은 주택 외벽과 학교 담장까지 골목골목이 이현세 만화로 장식돼 있다. 특히 매화중학교 250m 담장을 따라 ‘공포의 외인구단’을 축약한 그림이 압권이다. “엄지, 태어나서 이토록 행복했던 날은 처음이야” “혜성아, 넌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 한다 그랬지?” 주인공 오혜성과 엄지의 오글거리면서도 풋풋한 대사가 책장을 펼치듯 이어진다. ‘남벌’ ‘누구라도 길을 잃는다’ 등의 작품 속 명대사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매화면에 만화거리가 조성될 수 있었던 데에는 황춘섭 이장의 끈질긴 구애와 이현세 작가의 믿음, 안창회 작가의 열정이 있었다. 엄밀히 따지면 매화마을과 이현세는 아무 인연이 없다. 울진은 작가 부친의 원적지다. 그것도 이곳에서 10㎞ 넘게 떨어진 바닷가 사동마을이다. 모친은 만삭일 때 울진을 떠나 포항에서 이현세를 낳았다.

이렇다 할 볼거리가 없던 매화마을의 황 이장은 그 가느다란 인연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자 마을벽화 사업에 지원했다. 그러나 작가의 허락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고, 이현세도 처음에는 이장의 제안을 거절했다. ‘수도권에서 멀고, 북한 무장공비 침투 사건으로 기억되는 경북 오지마을에 벽화를 그려본들 누가 오겠는가’라는 현실적인 이유를 들었다. 황 이장은 포기하지 않고 작가의 사촌 누이까지 동원해 반년의 구애 끝에 가까스로 허락을 받아냈다고 한다.


2017년 마침내 사업이 결정되자 이현세는 처남인 안창회에게 작업을 맡겼다. 대형 광고대행사 제작국장 출신이자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한 이력을 믿었다. 처음엔 여러 화가가 동원됐지만, 2차 벽화부터는 단독으로 작업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서다. 힘들게 먼 곳을 찾은 여행객에게 실망을 줘선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국내 최초로 걸으며 보는 250m 벽화만화와 1,000m에 달하는 마을벽화가 완성됐다.

이현세 작가에게도 또 하나의 고향이 생긴 셈이다. 마을 중앙 바닷가 어시장을 그린 풍경화에는 ‘죽변의 쥐치물회’ ‘울진의 물곰탕’이 추억의 음식으로 언급돼 있다. 벽화만화를 둘러보는 것으로 아쉽다면 복지회관 안 마을 도서관에 꼭 들르길 추천한다. 이현세의 모든 작품을 구비하고 있고, 실내 분위기도 밝고 아늑하다. 도로변 ‘남벌열차카페’에서 따끈한 커피나 대추차를 마셔도 좋겠다.




세상에서 가장 꼬불꼬불한 ‘하이웨이’

매화면에서 울진 읍내로 올라와 36번 국도를 타면 봉화로 연결된다. 중앙고속도로 풍기IC를 이용하면 서울에서 울진까지 거리로는 가장 빠른 도로지만, 삼척까지 난 영동고속도로가 4차선 국도와 바로 연결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이용객이 적은 길이다. 2020년 새로 개통한 도로지만 왕복 2차선이라 주민들로선 아쉬움이 크다. 터널과 교량이 연속돼 추월이 불가능하다.

새로 닦은 도로가 이 정도면 옛길은 어떨까? 깊은 산중을 휘감은 계곡을 따라 쉼 없이 휘어진다. 단속 카메라가 없어도 시속 60㎞로 달리는 게 불가능하다. 이제 마을 주민들이나 이용하는 한적한 길인데 경치 하나는 기가 막히다. 그중에서도 풍광이 빼어난 약 15㎞ 구간 불영계곡은 일찌감치 국가명승으로 지정됐고, 최근엔 동해안지질공원에 이름을 올렸다. 선캄브리아기 편마암이 오랜 세월 갈라지고 다듬어져 돌개구멍, 절리, 토르(암석이 떨어져 탑 모양으로 돌출된 바위) 등 다양한 지질 구조가 관찰된다.



이 때문에 맑은 계곡에서 솟구친 바위마다 기암이요, 봉우리마다 괴석이다. 그 바위틈에 뿌리 내린 소나무가 언뜻 신선인 듯 착각을 일으킬 지경이다. 차량 통행이 뜸한 데다 빨리 달릴 수 없는 길이니 오히려 운전이 여유롭다. 도로변 2개의 전망대에서 느긋하게 쉬어가도 좋다.

불영계곡이라는 명칭은 불영사에서 비롯됐다. 신라 진덕여왕 5년(651) 의상 대사가 창건했다는 절로, 사찰 서쪽 부처처럼 생긴 바위 봉우리가 절간 마당의 연못에 비치기 때문에 그리 불린다. 오랜 역사에 비하면 규모나 짜임새는 수수한 편이다. 사찰은 도로와 도랑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지만, 산줄기에 막혀 보이지 않는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물길 따라 구부러진 숲길을 약 1㎞ 걸어야 한다.




보물로 지정된 대웅보전을 비롯해 극락전·응진전·명부전·범종각 등 여러 전각이 연못을 중심으로 흩어져 있다. 대웅보전에 걸린 영산회상도 역시 조선 후기 불화의 전형을 보여주는 보물로, 지난해 봄 화마를 피해 다른 곳으로 옮겼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특이하게도 극락전은 다른 전각과 떨어져 서쪽 산자락에 숨은 듯 자리 잡았다. 부처바위에 걸린 저녁 햇살이 연못에 반짝이면 피안의 세계인 듯 아득하면서도 신비롭다. 새 도로가 난 뒤 방문객이 줄어 산중 절간이 더욱 고요하다.

불영계곡은 금강송면에 속한다. 매화면과 마찬가지로 2015년 서면에서 개명했다. 불영계곡 상류 소광리에 금강소나무 군락지가 있다. 오래된 나무는 속이 황금빛을 띠고 재질이 단단해 황장목으로, 벌목한 나무를 봉화 춘양역으로 옮겨 실어 날랐기 때문에 춘양목으로도 불린다. 조선시대부터 ‘황장봉계’ 표석을 세워 함부로 베지 못하도록 보호해 온 귀한 소나무다. 금강송 군락지는 요즘에도 숲나들이(foresttrip.go.kr)에서 예약한 후에나 숲길을 걸을 수 있다. 산불조심 기간인 4월 말까지는 이마저도 불가하다. 계곡 초입의 ‘금강송에코리움’ 투숙객만 주변에 조성한 숲길을 걸어볼 수 있는 형편이다.



불영계곡 하류에 ‘울진-현동 도로준공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돌을 깨고 굴리는 동상에 건설노동자와 군인이 함께 있다. 1984년 개통한 도로 공사에는 4개의 민간 건설사 외에 제6619부대와 제1117야전공병단이 투입됐다. 이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9명의 병사와 1명의 건설노동자 이름이 비석에 새겨져 있다. 요즘에는 상상할 수 없는 개발독재시대의 어두운 유산이다.

도로 준공을 축하하는 조병화의 헌시는 ‘공병 형제들의 피와 땀 그 희생’을 감사히 여기라 충고하며 ‘오 쾌적한 이 하이웨이 그 희열 겨레의 힘이여!’라고 마무리한다. 희생과 희열, 이해하기 힘든 조합으로 만들어진 그 ‘하이웨이’도 이제 차츰 잊히고 있다.





요즘 울진으로 여행한다면 대표 먹거리인 대게를 빼놓을 수 없다. 23일부터 26일까지 후포항 일대에서 '2023 울진대게와 붉은대게축제'가 열린다. 거일리 대게원조마을의 해원굿 공연을 비롯해 관광객이 참여하는 대게 잡기, 일출요트, 등기산 걷기 등의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축제라고 특별히 값이 싸지는 않지만, 요즘이 가장 살이 꽉 찬 계절이라 본고장에서 신선한 대게 맛을 즐길 수 있다.

울진=글·사진 최흥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