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가 빈번한 공간은 따로 있다
늦은 밤, 희미한 가로등이 띄엄띄엄 비추고 있는 어두컴컴하고 좁은 골목길을 걸어가는 느낌은 어떨까. 누군가 내 뒤를 따라 걸음의 박자를 맞추는 것 같아 등줄기가 오싹해질지도 모른다. 어두운 골목길, 낡은 건물, 방치되어 있는 주택… 이러한 공간의 공통점은 바로 '범죄'에 취약한 환경이라는 것이다. 이는 범죄영화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환경과 다르지 않다.
2022년 통계청 사회조사에 따르면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불안요인에 대해 신종 질병이 21.0%, 국가안보가 14.5%, 그리고 범죄 발생이 13.9%로 세 번째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또 13세 이상 인구 3명 중 1명꼴인 29.6%가 야간보행 시 불안하다고 느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불안의 원인으로 인적이 드문 곳이라서(27.4%), 가로등, CC(폐쇄회로)TV 등 안전시설이 부족해서(19.5%), 치안시설이 부족해서(7.8%), 우범지역이 존재해서(3.2%) 등 물리적 공간을 꼽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연령이 낮을수록, 남성보다 여성이 밤길 불안이 높았다.
소통과 개방의 공간으로 범죄 감소
유리창이 깨진 채 방치돼 있는 빈 가게가 있다면? 처음엔 사람들이 무관심하다가 점차 쓰레기를 던지기도, 돌을 던져 보기도, 혹은 그 깨진 유리창으로 들어가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른바 '깨진 유리창이론'을 일컫는 것으로 사소한 잘못이 큰 문제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범죄심리학 이론이다.
환경적 요인에 따라 인간의 정서와 행동이 영향을 받게 되고 범죄를 일으킨다면, 범죄 불안을 줄이고 예방할 수 있는 환경조성 방법은 없을까. 바로 '셉테드(CPTED: Crime Prevention Through Environmental Design)'라고 불리는 범죄예방환경설계를 통해 가능하다. 셉테드는 1961년 미국 사회운동가인 제인 제이콥스(Jane Jacobs)가 제안한 것으로 세계 각국에서 공간디자인을 통해 범죄를 예방하고 사람들의 불안을 감소시키는 데 활용되고 있다.
국내에는 2005년 경찰청이 경기 부천시 일부 주택가를 셉테드 시범지역으로 지정하면서 도입되었으며 현재 많은 지자체에서 적용하여 절도, 강도 등의 주요 범죄가 감소하고 주민들의 지역에 대한 만족 역시 상승하고 있다. 건축물의 설계뿐만 아니라 LED 가로등, 여성안심 귀갓길, 안전 비상벨, 로고 젝터(바닥 등에 문구나 문양을 빛으로 비추는 것), 담장벽화, 공터 공원설치 등이 모두 셉티드의 사례이며 주택가뿐만 아니라 대학가, 상업시설 밀집지역 등에도 적용된다. 최근에는 지능형 CCTV, 사물인터넷(IoT)센서 등이 결합한 스마트 셉테드를 통해 선제적으로 범죄예방을 위한 것에 활용되기도 한다.
안전한 공간 설계와 유지는 범죄예방환경전문가로부터
그렇다면 이런 환경을 조성하는 범죄예방환경전문가는 누구일까. 범죄예방 건축물이나 시설을 설계하고 지역의 특성을 고려한 디자인과 스토리를 입히고, 조성된 공간이 안전한 환경이 되도록 유지·관리하는 일련의 모든 과정에 범죄예방환경전문가가 필요하다. 따라서 건축사를 비롯해 공간디자인 설계 전문가, 도시재생전문가, 조경전문가, 보안전문가, 그리고 경찰관 등이 모두 해당된다.
경찰청에서는 2016년부터 범죄예방진단경찰관(CPO, Crime Prevention Officer)제도를 도입하여 지역 내 우범지역 등의 정보를 수집하고 지자체와 협업하는 범죄예방활동을 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범죄예방환경을 완벽히 조성했다고 하더라도 주민들의 적극적 참여를 비롯해 꾸준히 유지·관리되지 않는다면 다시 '깨진 유리창'으로 사람들의 불안과 공포가 스며들 수 있음을 유념할 필요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