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봄, 동네 카페에서의 일이다. 여느 날처럼 카페 사장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유모차에 아이를 태운 만삭 엄마가 들어왔다. 그 카페는 손님끼리 띄엄띄엄 말을 건네도 모두 받아주는 분위기가 흐르기도 했고, 아이를 워낙 좋아하는 나였으니 자연스레 말이 나왔다. "와~, 아이가 이뻐요." 그러자 예상치 못했던 그 엄마의 대답. "괜찮을까요…?"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한다. 무슨 일일까? 뭔 일이 있었나? 아이를 집에서 돌봐야 하는데, 점점 배가 불러와 할 수 없이 이렇게 어린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겼노라 말하는 그녀의 젖은 목소리에 내 맘도 울렁였다. "아유, 잘했네요.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하죠." 카페 사장님과 이구동성으로 응원의 폭풍수다를 내놓았다. 나도 그랬지, 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 있다는 것은 큰 위안이 되리라 생각하면서.
책방을 하고 있어 이제 자주 들리진 못하지만, 그 카페를 지날 때마다 그날의 그녀와 아이들이 어찌 지내는지 궁금해진다. 단 몇 분을 스치듯 있었을 뿐인데, 왜 두고두고 떠오르는 걸까? 책방을 준비하면서 읽었던 '오래된 작은 가게 이야기'에 따르면 난 그 순간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비록 짧은 일화로 끝난 인연이었지만, 이 책의 부제처럼 그날 그 카페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곳'이 되어준 것이다. 마음 나눌 곳이 점점 귀해지는 요즘이니, 나에게도 특별한 경험으로 각인되어 있다.
'제3의 장소'가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 회자하고 있다. 집과 일터 사이, 집과 학교 사이 중간역처럼 '집을 떠난 집'이 되어주는 공간을 찾는 것이다. 좋아하는 라디오 주파수를 고정하고 기꺼이 매일 그 시간 청취자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끌리는 공간은 무엇이 다를까? "바로 여기야! 오늘부터 단골이 될 테야!" 하게 만드는 곳의 공기는 어떻게 다를까? 소매업과 상품기획을 연구하고 강의하는 저자는 '제3의 장소는 그저 공간이 아니라 그 안에서의 시간과 관계를 모두 아우른다'고 말한다. 사실 그랬다. 식당과 카페, 책방, 떡집, 세탁소, 미용실, 편의점, 수선집, 부동산… 우리가 드나드는 이 모든 곳은 예전부터 제3의 장소로 존재해 왔다. 가게 이름과 형태가 바뀌었을 뿐이다. 중요한 건, 무심코 들리는 이 가게들이 어쩌면 내 삶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는 보물섬이 되어줄 수도 있다는 걸 알아차리느냐 아니냐의 차이.
저자는 운 좋게도 6년 동안 미국에서 유학하며 살던 동네마다 보물섬 같은 가게들을 만났고, 덕분에 덜 외롭고 더 풍성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문득 들려 와인을 즐기며 캔버스에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가게처럼 아이디어가 빛나는 공간 이야기도 좋았지만, 밑줄 쫙 치며 고딕체로 따라 적고 싶은 대목은 바로 "관계"였다. 거의 매일 들리는 손님의 커피 취향을 알아차리는 카페, 손 글씨로 써 놓은 크리스마스카드를 깜짝 선물로 건네는 카페, 엄마가 딸을 챙기듯 몸 컨디션까지 살펴보며 덤으로 음식도 챙겨주는 쌀국숫집… 책장을 넘기며 만났던 작은 가게들의 이야기는 인상적이고 감동이었다.
우리가 사는 동네가 조금 더 '낭만적이어야 할 때가 되었다'는 저자의 말에 백 번 동의하고 공감한다. '소박하고 투박하지만, 은은한 빛을 내는 관계'들이 우릴 살릴 테니까. 우린 함께 살아야 하고, 우린 누군가의 응원을 먹고 살아야 하니까. 코로나 시대를 지나면서 우린 '함께'의 의미를 그 어느 세대보다 간절하게 깨달았으니까.
수백 년을 이어오는 외국의 노포들 스토리가 부러웠던 이들이라면, 나만의 단골 가게로 삶이 더 풍성해지고 싶다면, 강력한 스토리를 가진 브랜드로 성장하고 싶은 작은 가게 주인장들이라면 이 책을 펼쳐 보시라. 작지만 큰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