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業)에 성별은 중요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현장에서 직접 부딪히며 몸소 증명해내는 이들이 있다. 존재만으로 공고한 성별 고정관념을 깨부수는 남자 간호사와 여성 항해사가 최근 자신들의 직업 이야기를 책으로 출간했다. 이들은 "사회의 시선과 관계없이 스스로 자신의 일을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남자가 무슨 간호사야'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간호사의 일은 성별 구분이 없다'고 답해요." (유중윤 응급간호팀 간호사)
최근 세브란스병원 간호국 소속 남자 간호사 14명이 직업 에세이 '간호사가 되기로 했다(시대의창 발행)'를 출간했다. 일분일초가 시급한 응급실부터 수술실, 장기이식센터, 어린이병원 등 대형 병원의 구석구석에서 겪는 이야기를 생생하게 담았다. 한국에 남자 간호사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62년의 일이지만, 여전히 사회에는 '간호'와 '돌봄'은 여성의 일이라는 편견으로 차있다. 지금까지 배출된 남성 간호사가 3만여 명을 훌쩍 넘는데도 사정은 비슷하다.
책은 간호사가 되기로 결심한 계기에서 시작해 각자 맡은 분야에서 전문성을 다해 일하는 모습까지, 직업을 둘러싼 이야기를 풍성하게 담았다. 저자 중 한 명인 임희문(35·신생아과) 간호사는 신생아중환자실에서 커다란 성인 남성의 손으로 1㎏이 채 되지 않는 미숙아를 돌본다. 젖병수유 등 산모를 '훈련'하는 것도 그의 몫. 그는 "아기 분유 먹이고 트림시키기 대회가 있다면 분명히 내가 우승할 것"이라 말했다.
이들은 언젠가 '남자 간호사'가 아닌 '간호사'로 불리는 것이 당연한 날을 고대하며 책을 썼다. "간호대학을 다닐 때 고충을 나눌 멘토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남자지만 간호사를 꿈꾸는 학생들에게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뀔 수 있는 책으로 읽혔으면 좋겠습니다." (김진수 수술간호팀 간호사)
4년 전 '나는 스물일곱, 2등 항해사입니다'라는 첫 책을 냈던 항해사 김승주(30)씨는 1등 항해사가 되어 돌아왔다. 그는 '오진다 오력(들녘 발행)'이라는 새 에세이집에서 만만하지 않은 바다 위 생활에서 체득한 다섯 가지 힘을 소개한다. 정신력, 체력, 지구력, 사교력, 담력 등 능력을 키우기 위해 시도한 방법들과 일화를 진솔하게 담았다. 육지보다 바다에서 보내는 날이 더 많은 그가 타는 컨테이너선은 무게만 11만 톤에 달한다.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의 항로를 쉬지 않고 24시간 운항한다.
1등 항해사 중에서도 김씨처럼 화물선에 종사하는 여성 선원은 세계적으로도 전체의 0.1%밖에 되지 않는다. 그는 한국일보와의 전화통화에서 "배를 타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맡은 일을 다하는 해저의 닻과 같은 '닻 정신'을 중요하게 여긴다"며 "여성 항해사가 극소수라 헤쳐나갈 것이 많지만, 소수가 평균이 될 때까지 다른 여성 후배들을 위해 닻처럼 묵묵히 견뎌내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중년 남성의 일로 쉽게 그려지는 건설 현장. 그중에서도 도배사로 일하는 청년 여성 배윤슬(30)씨의 '청년 도배사 이야기'(2021년·궁리 발행)를 시작으로, 성역할 고정관념을 깨고 직능인으로 활약하는 젊은이들의 직업 에세이가 출판 시장에 속속 등장하고 있다. '남자의 일' '여자의 일'을 엄격히 구획하던 과거의 직업관을 극복하고, 실용적으로 사고하며 일의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MZ세대의 특성이 드러난다는 분석이다.
청년들 사이에 자신의 개성이나 정체성을 중심에 두고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는 욕구가 높아지는 현상도 읽을 수 있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전통적 성역할에 기반을 둔 직업관을 극복하는 책들이 출판시장에서 많이 확산돼 실제 노동 현장을 변화시킬수록, 서비스의 수요자와 공급자 모두 다양한 선택지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