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오전 서울 광진구 광장동의 한 삼거리. 25톤 덤프트럭이 우회전 깜빡이를 켜고 몇 초간 잠시 멈췄다가, 이내 우회전을 시도했다. 횡단보도 신호등은 녹색불이었고, 보행자들은 길을 다 건너지 못한 상황이었다. 트럭은 길을 건너던 70대 여성을 들이받아 피해자는 그 자리서 숨졌다. 사흘 뒤인 13일에도 동작구 대방동 한 삼거리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던 70대 여성이 우회전하는 마을버스에 치여 목숨을 잃었다.
최근 교차로에서 우회전 차량이 보행자를 치어 사망하게 하는 사고가 잇따르고 있다. 지난해 7월 도로교통법 개정으로 운전자는 교차로에서 우회전할 때 횡단보도에 사람이 보이면 무조건 멈춰야 한다. 보행자가 횡단보도를 건널 때는 물론, 통행 ‘의사’만 보여도 그렇다. 하지만 반 년이 넘은 지금 일시정지 의무는 벌써 잊힌 듯하다. 관련 사고가 여전히 끊이지 않는데 특히 어린이, 노인 등 교통약자에게 피해가 집중돼 개선책 마련이 시급해 보인다.
취재진이 16일 오전 1시간 동안 서울 종로구 이화사거리에서 한국방송통신대 방면으로 우회전하는 차량을 지켜봤더니, 일시정지 의무를 지킨 차량은 182대 중 고작 2대(1.1%)뿐이었다. 오전 10시 42분쯤 한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은 60대 여성이 횡단보도 신호가 녹색불로 바뀌길 기다리고 있는데도 그대로 우회전했다. 보행신호가 빨간색 불이어도 횡단보도에 통행 대기자가 보이면 일단 멈춰야 한다. 2분 뒤에는 폐지 리어카를 끄는 한 노인이 횡단보도를 절반쯤 건넜을 때 오토바이가 우회전 통과했다. 경찰 관계자는 “보행자가 횡단보도를 건너는 상황에서 우회전은 절대 금물”이라고 말했다.
같은 시간 양천구 서울남부지검 사거리 풍경도 다르지 않았다. 한 택시는 전방 직진신호가 바뀌어 보행자들이 막 횡단보도를 건너려던 찰나 쏜살같이 우회전해 지나갔다. 60대 여성 박모씨는 “허리통증으로 걸음이 느려 보도를 다 건너기 전에 빨간색 불로 바뀔 때가 있는데, 등 뒤로 차가 지나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라고 했다.
이처럼 우회전 사고는 교통약자에 집중돼 심각성을 더한다. 실제 지난해 7~12월 판결이 확정된 ‘횡단보도 내 우회전’ 사고 109건을 분석한 결과, 피해자가 60세 이상인 경우가 56건(51.4%)으로 절반을 넘었다. 13세 미만 어린이가 피해자인 사고도 13건(11.9%) 있었다. 노인ㆍ어린이를 합치면 전체의 63.3%나 된다. 신체적 방어 능력이 떨어지다보니 피해 정도도 컸다. 전치 3주 이상 중상자와 사망이 각각 72명(66.1%), 19명(17.4%)에 달했다. 무단횡단 등 피해자 과실은 2건(1.8%)에 그쳤다.
사정이 이렇지만 운전자들도 할 말은 있다. 세종시에 사는 김모(37)씨는 “보행자가 횡단보도를 다 건널 때까지 무작정 기다린다”면서도 “이곳은 가뜩이나 도로 대부분이 편도 2차선에 불과한데 교통체증이 더 심해졌다”고 불만을 표했다. 화물차, 버스 등 대형차 운전자들은 “문제의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고 지적한다. 대형차는 차고가 높고 회전 반경도 커 우측 사각지대가 많다. 여기에 한국은 교차로와 횡단보도 사이 거리마저 짧아 우회전 시 보행자를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판결문 분석에서도 화물차ㆍ버스가 가해 차량인 사고도 42건(38.5%)에 달했다. 한 운전자는 “횡단보도를 교차로에서 멀리 떨어뜨리는 작업부터 선행돼야 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교통전문가들의 생각은 다르다. 중장기적으로는 현재 경찰이 전국 15곳에서 시범 운영 중인 ‘우회전 전용 신호등’을 보급하되, 그 전까지는 운전자들이 일시정지 의무를 준수하는 것이 사고를 줄이는 지름길이라는 설명이다. 박무혁 도로교통공단 교수는 “교차로와 횡단보도 이격 거리를 늘리는 건 보행자 불편도 감수해야 해 쉬운 해결책이 아니다”라고 짚었다. 김진유 경기대 교수는 “우회전 차량이 감속할 수 있게 과속방지턱을 설치하는 방안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