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무서운 적은 '직장 동료'였다. 넷플릭스 예능 프로그램 '피지컬100'에서 남경진은 모래 실어 나르기 게임 상대로 장은실을 지목한다. 둘은 2018년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게임에 레슬링 남녀 국가대표로 출전한 '레슬링 남매'였다. 남경진이 먹잇감으로 여성 후배를 택한 건 장은실 팀에 여성만 세 명이었기 때문이다. 성별 가리지 않고 힘을 겨루는 5대 5팀 전에선 누가 봐도 불리한 조건이었다. 장은실이 믿을 건 오직 그의 몸뿐이었다. "게임은 경기장 안에 들어가 봐야 아는 거니까. 실전에서 보여드리겠습니다". 사력을 다해 자기 몸을 단련하고 그 성취감을 맛본 사람만이 표현할 수 있는 자신감이었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장은실은 이 경기에서 승리했다. 오합지졸이라 불린 최약체 팀의 반란이었다. 이 회차가 공개된 이달 첫째 주 세계 각국에선 1,000만 명이 넘는 시청자가 넷플릭스에 접속해 '피지컬100'을 지켜봤다.
'몸의 전쟁'이 세계를 후끈 달구고 있다. 넷플릭스에 따르면, '피지컬100'은 6일부터 12일까지 일주일 동안 비영어 TV 시리즈 부문 시청 시간 세계 1위를 차지했다. 8일엔 영어·비영어 부문 통틀어 정상(플릭스패트롤 기준)에 올랐다. 두 기록 모두 K예능 최초다. '피지컬100'은 근육으로 다져진 100명의 출연자가 '오징어 게임'처럼 피 튀기는 서바이벌 경쟁을 한다고 해 국내에서 '근징어 게임'이라 불리며 입소문을 탔고, 외신들은 "'오징어게임'이 영화 '글래디에이터'를 만났다"(영국 일간 가디언)며 주목했다. 그간 '오징어 게임'과 '지금 우리 학교는' '사랑의 불시착' 등 여러 드라마가 세계 시장에서 크게 주목받은 것과 달리 예능은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을 고려하면 이례적 열광이다. 이전까진 '솔로지옥'(2021)이 비영어 TV 시리즈 부문 5위를 차지한 게 K예능의 최고 성적표였다. 1인치의 언어 장벽과 문화적 이질성을 넘어 강한 몸에 대한 호기심과 열광을 지렛대 삼아 '피지컬100'이 세계 콘텐츠 시장에 이정표를 세운 것이다.
'피지컬100'에서 소방관인 신동국은 이종격투기 선수인 추성훈과 맞대결에서 진 뒤 그와 포옹하고 경기장에 엎드려 상대에게 큰절을 한다. 추성훈은 그런 도전자를 일으켜 세운 뒤 함께 팔을 들어 올렸다. 미국 콘텐츠 리뷰 사이트인 IMDB엔 "미국 서바이벌이었으면 분명 갈등을 부추겼을 텐데 '피지컬100'은 정반대로 협력과 스포츠맨십을 강조한다. 그래서 신선하다"(John****) "인간적 예의에 대해 이렇게 많이 배우게 될 줄은 몰랐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선수들이 서로를 존중하는 모습에 경외감을 느꼈다"(jack****)는 내용으로 영어로 쓴 글이 잇따라 올라왔다.
장르는 예능이지만 '피지컬100'은 다큐멘터리처럼 진지하다. 지난해까지 열두 시즌을 이어온 미국 NBC '아메리칸 닌자 워리어' 등 기존 서바이벌 프로그램과 비교해 대결은 살벌하고 치열한 게 차별점으로 꼽힌다. 성상민 대중문화평론가는 "참가자 개개인의 캐릭터를 만들어주기 바쁜 기존 서바이벌 프로그램과 달리 예능적 요소를 지우고 체력을 토대로 한 경쟁의 진지함에 집중해 해외에서도 주목받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웃음기를 싹 뺀 이 프로그램에서 시청자들이 주목하는 피지컬은 우락부락한 근육질 몸이 아니다. 생존에 최적화된 몸이다. 산악구조대인 김민철은 게임을 거듭할수록 두각을 나타낸다. 관상용으로 가꾼 몸이 아닌 험난한 산에서 인명구조로 단련된 몸에서 나오는 저력이다. 그가 극한의 게임에서 버틸 때마다 경기장에선 "저 사람이 산악구조대면 (산에) 믿고 가도 되겠다" "목숨을 맡겨도 된다"는 탄성이 터져 나온다.
'피지컬100'의 인기는 전시하기 위한 몸을 위한 '보디 프로필' 촬영 유행과 결이 다르다.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의 주 사용자인 1030은 왜 예능에서 생존을 위한 몸에 열광하는 걸까. 이 흐름은 '초(超)위험시대'의 증후로 읽힌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사회의 불확실성은 수직상승했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세계의 시계는 20세기의 냉전시대로 되돌아갔다. 핼러윈 참사로 안전은 압사당했고 예상치 못한 강도 높은 지진은 튀르키예와 시리아에서 삶의 터전을 죽음의 공간으로 바꿔놨다. 극한의 고난을 잇따라 직면하며 청년들이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공호'로 생존을 위한 몸에 매달리는 것이란 분석이다. '2023 트렌드 모니터'를 낸 윤덕환 마크로밀엠브레인 이사(심리학 박사)는 "불확실성과 위험이 커지는 사회에서 안전을 담보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는 국가와 회사가 아니라 결국 개인이고 그걸 지탱하는 게 바로 몸"이라며 "요즘 청년들은 젊음과 몸은 지켜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고 그래서 외국어 공부 같은 자기계발보다 몸 관리에 더 매달리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청년들이 가장 많이 꼽았던 새해 계획이 애초 취업에서 팬데믹 이후 지난해 몸 관리(잡코리아)로 바뀐 배경이다. 이런 흐름 속에 청년들은 체력 관리에 더욱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직장인 이문수(24)씨는 "운동만큼은 내가 하는 만큼 결과물이 나온다"며 "그렇게 운동으로 일상에서 안정감을 찾고 전날 밤에 대충 보고서 작성 등 다음 날 해야 할 일을 해두고 운동을 한 뒤 출근하는 사이클로 산다"고 말했다.
'피지컬100'을 향한 몰입은 취업난과 조직 내 불공정 성과 평가 등에서 청년들이 느끼는 무력함의 반작용으로도 해석되기도 한다. 내가 흘린 땀, 즉 운동의 대가가 투명하게 내 몸으로 드러나고 그 결과를 오롯이 차지할 수 있는 데 따른 환호다. "인간의 몸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스스로 쓴 고통의 역사이자 그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피지컬100'은 이런 내레이션으로 시작해 몸 전쟁의 투명성을 강조한다. 김헌식 카이스트 미래세대 행복위원회 위원은 "MZ세대에 원칙과 상식은 화두"라며 "회사에서 이룬 실적은 개인의 성취물이 되지 않고 그 성과가 축소되는 걸 경험한 젊은 세대가 '정직한 결과물'로 운동에 반응하는 것"이라고 바라봤다.
이 맥락에서 '공정'에 대한 신화는 '피지컬100' 열풍의 또 다른 땔감으로 쓰이고 있다. '피지컬100'에서 참가자들은 성별, 나이, 체급 구분 없이 맞붙는다. 이곳에서의 공정은 공평하고 올바르다는 의미보다 참가자들이 동의하거나 합의한 규정을 지키고 따르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피지컬100' 두 번째 관문이었던 공 뺏기 대결은 성별과 체급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종목이다. 이 대결에서 남성 이종격투기 선수는 여성 보디빌더를 지목했고 힘으로 제압해 승리했다. 하지만 성별과 체급 구분 없는 대결이 과연 공정할까. 윤김지영 창원대 철학과 교수는 "사회적 배경을 가지지 않고서 한 개인이 맨손으로 해낼 수 있는 영역이 이 땅에서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며 "특정 나이대와 성별 그리고 유전적인 신체 자본을 가장 강한 몸이 이기는 것이 공정이라고 바라보는 것은 경계해야 할 일"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