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름 가래만 20년째"...대구지하철참사 피해는 '진행형'

입력
2023.02.18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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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 부상자 151명 중 15명 사망 
1~4급 호흡기장애 판정만 69명
"세월호·이태원참사 안전불감증 판박이"

"눈을 뜨면 피고름 섞인 가래부터 뱉습니다. 20년간 제 하루는 그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대구 시민 박숙자(67)씨 삶이 악몽으로 바뀐 것은 20년 전이다. 2003년 2월 18일 대구지하철 1호선 전동차에 몸을 실었던 박씨는 중앙로역에서 화재가 발생하자 사람들을 따라 검은 연기를 뚫고 무작정 뛰었다. 그가 발견된 곳은 중앙로역 지하 2층. 가까스로 구조된 박씨는 병원으로 이송됐다.

참혹한 참사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는 안도의 한숨도 잠시였다. 살아남은 자의 고통이 박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고 직후부터 2년간 목에 숨구멍을 뚫고 투병 생활을 시작한 그는 20년간 기도 확장 수술만 11차례 받았다. 하지만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차고, 알코올 냄새만 맡으면 기도가 답답해진다. 박 씨는 "날씨가 춥고 건조한 2월이 되면 사고 악몽까지 겹쳐 견디기 힘들다"며 "그런 2월이 벌써 20번째"라고 말했다.

목숨 걸고 인명구조한 소방관도 고통에

192명이 숨지고 151명이 부상한 대구지하철참사가 발생한 지 20년이 지났다. 그사이 호흡기와 정신과 질환을 호소하던 15명이 세상을 등졌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초기 신천지발 집단감염 등으로 대구·경북에서 확진자가 속출한 탓에 유명을 달리한 부상자도 있다. 하지만 그날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 부상자 136명의 고통도 진행형이다.

17일 대구지하철참사부상자가족대책위원회에 따르면, 참사 당시 삽시간에 번진 화재로 부상자 상당수는 기관지와 성대 등 호흡기가 통째로 녹아내렸다. 1~4급 호흡기장애 판정을 받은 부상자만 69명이다. 정신적 충격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한 사례도 부지기수고, 폐암 수술 등으로 병상에 누워있는 부상자도 8명이다.

참사 당일 한 명의 목숨이라도 더 구조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현장에 뛰어든 소방관들도 그날의 고통에서 예외가 아니다. 당시 대구 중부소방서 소방관으로 참사 현장에 투입된 변재관(62)씨는 기도 화상과 폐 손상을 입었다.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웠던 변씨는 지난해 연말 내시경검사에서 폐에서 결절이 발견됐다는 결과를 받았다. 20년이 지났지만 변씨 몸속에서 그날의 사고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변씨는 "참사 현장에 40분 용량의 산소통을 갖고 구조에 나섰는데 부상자에게 마스크를 씌워주다 보니 15분 만에 산소가 떨어져 유독가스 흡입을 피할 수 없었다"며 "유독가스를 흡입해 배를 내놓고 쓰러져 있던 희생자들의 안타까운 모습에 지금도 잠을 설치는 날이 많다"고 말했다.


고3 여학생의 삶도 송두리째 날려

참사 트라우마로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는 이들도 적지 않다. 20년 전 발랄했던 고등학교 3학년 여학생의 삶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민금순(65)씨의 딸은 사고 후 트라우마로 16차례나 극단적인 시도를 했다. 민씨는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딸이 영어학원에 가다가 사고를 당한 후 심리상담에 폐쇄병동 수용까지 해보지 않은 치료가 없지만 백약이 무효"라며 "정상적인 생활은 불가능하다"고 흐느꼈다.

참사 당일 2차례 방화범을 저지했던 전용남(85)씨는 "지금도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했다. 참사 직전 대구지하철 1호선 교대역에서 탑승한 전씨는 바로 앞에서 운동복 차림에 하얀 통을 들고 라이터를 만지작거리는 방화범을 마주했다. "왜 자꾸 불을 켰다 껐다 하느냐"며 교대역과 중앙로역 전 역인 반월당역에서 그를 제지했다. 하지만 끝내 중앙로역 방화를 막지 못한 것이 한으로 남아 있다.

반복되는 후진국형 참사 안타까워

참사 후 '사고 없는 대한민국'을 갈망했던 부상자들은 2014년 4월 세월호참사, 지난해 10월 이태원참사 원인이 안전불감증이라는 데 또다시 고개를 떨궜다. 전씨는 "대구지하철참사를 계기로 우리 사회가 안전의 중요성을 깨달았다면 제2, 3의 참사는 없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되풀이되는 후진국형 사고 때문에 무고한 시민들이 목숨을 잃는 순간을 보는 게 너무 힘들다"고 말했다.

부상자들과 가족들에게는 고통스럽게 견뎌온 날 못지않게 앞으로도 걱정이다. 참사 발생 16년 만인 지난 2019년에야 대구시는 부상자 의료지원 조례를 제정했다. 하지만 지원도 올해가 마지막이다. 홍준표 대구시장이 15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올해는 부상자분들이 요구하는 치료연장을 추진하겠다"고 했지만 불안하기 그지없다. 참사를 계기로 2016년에 만들어진 2·18안전문화재단은 중앙로역에 추모 공간을 마련하고, 18일 대구 동구 시민안전테마파크에서 추모식을 거행한다.

지난 2003년 2월 18일 오전 9시 53분쯤 대구 중구 대구도시철도 1호선 중앙로역에 정차한 1079호 열차에서 방화로 화재가 발생해 맞은편에서 들어오던 1080호 열차로 옮겨붙어 35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희생자 6명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신원이 확인되지 않거나 연고자를 찾지 못했다.


대구= 류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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