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회사에 돈 빌린 삼성전자가 반도체 투자 의지 꺾지 않는 이유…"AI 경쟁이 반도체 수요 기폭제"

입력
2023.02.16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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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회사에 차입해서까지 투자 기조 재확인
치킨게임으로 경쟁사와 격차 벌리기
AI 확산에 따른 반도체 수요 폭증 대비


현금성 자산만 130조 원을 가진 삼성전자가 자회사 삼성디스플레이에 20조 원을 빌렸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반도체 업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해부터 반도체 경기가 가라앉으면서 SK하이닉스, 마이크론 등 경쟁사들은 올해 반도체 투자를 줄이기로 발표했기 때문이다. 반도체 업계에선 업황이 예상보다 빠르게 회복할 수 있다는 전망을 바탕으로 내린 결정 아니겠느냐며 기대 섞인 해석도 내놓고 있다.

15일 삼성전자 분기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 말 기준 삼성전자의 현금 및 현금성 자산 및 단기금융상품 보유액은 128조 원이다. 하지만 보유금의 상당액이 미국 등에 있는 해외법인에 있고 단기금융상품이나 배당금 등으로 묶여 있기 때문에 이를 마련하는 비용도 감안해야 했다. 삼성전자는 삼성디스플레이로부터 빌리는 것이 낫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알려진다.



시장에 "감산 없다"는 강력한 메시지


이번 차입을 통해 삼성전자는 투자 기조를 이어갈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삼성전자는 올해 대략 50조 원을 반도체 시설 투자에 집행할 계획이다.

삼성전자가 무리를 하면서까지 반도체 투자를 단행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①우선 SK하이닉스, 마이크론이 생산량을 줄이는 시점에서 오히려 투자를 늘려 시장 점유율을 높인다는 것이다. 삼성전자는 경쟁사 대비 기술·원가 경쟁력 모두 우위에 있는 만큼 치킨게임에서 버틸 수 있다. 경계현 삼성전자 사장도 1일 임직원들에게 "왜 감산하지 않냐는 질문이 많지만 지금 우리가 손 놓고 다른 회사와 같이 가면 좁혀진 경쟁력 격차를 (다시) 벌릴 수 없다"라며 "메모리 점유율 40%에 만족하면 안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②여기에 챗GPT라는 대형 호재까지 등장했다. 초거대 AI는 엄청난 규모의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는 컴퓨팅 인프라가 필수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챗GPT를 자사 서비스에 접목하기 위해 오픈AI에 100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했다. 챗GPT에 대항하기 위해 AI챗봇 '바드'를 내놓았다가 오답 논란으로 자존심이 크게 상한 구글 역시 AI 투자를 크게 늘릴 것으로 예상된다. 애플, 아마존, 중국 텐센트 등 주요 빅테크들도 사활을 걸고 AI 반도체 개발에 나서고 있다.

데이터 처리에 필요한 고성능 메모리반도체 수요부터 AI 반도체 생산을 위한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주문도 크게 증가할 수밖에 없다. 이미 세계 최대 파운드리 기업인 대만의 TSMC는 시장의 예상을 뒤집고 올 1월 역대 최고 매출을 올렸다.



반도체 슈퍼사이클 재현할 수 있을까



업계에선 AI가 세계적으로 보급이 빨라지면서 2018~2019년 이후 다시 반도체 슈퍼사이클(장기 호황)이 올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까지 나오고 있다. 지금 당장 업황이 안 좋더라도 미래를 위한 투자가 필요한 이유다.

2018~2019년 당시 구글, 아마존 등 빅테크 기업들은 새로 짓는 데이터센터(IDC)에 들어갈 서버용 반도체를 구하기 위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본사에 직원을 파견하면서까지 공을 들였다. 이는 스마트폰 확산과 롱텀에볼루션(LTE) 통신망이 본격 상용화되면서 유튜브, 넷플릭스, 인스타그램 등 각종 모바일 서비스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진 결과였다. 당시 메모리반도체값이 크게 올랐지만 두 회사의 제품은 만드는 족족 다 팔렸다. 이 역시 시장 상황이 좋지 않았던 2015~2016년 국내 반도체 기업들이 과감한 투자를 통해 대비를 했기에 가능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이승우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챗GPT에 대한 셀럽의 찬사와 언론의 보도, 초기 가입자 증가 속도가 주식 시장에 고스란히 반영되기 시작했다"며 "AI 개발 경쟁이 다시 불을 뿜는다면 반도체 수요의 새로운 기폭제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안하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