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의 '미성년 성범죄 피해자의 영상녹화물 증거사용 위헌' 결정 이후에도 가해자 대부분은 유죄 판결을 받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법조계에선 "피해자들의 법정 증언과 수사기관에서의 진술이 일관성이 있다면 가해자들이 죗값을 피할 수 없다"고 분석했다.
헌재는 2021년 12월 법정 출석 없이 미성년 성범죄 피해자의 수사기관 영상진술을 증거로 채택할 수 있도록 한 성폭력 처벌법 조항에 대해 "반대신문권을 보장하지 못한다"며 위헌 결정을 내렸다. 가해자가 피해자의 수사기관 진술을 증거로 채택하는 것에 부동의하면, 미성년 피해자들이 법정에 나올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위헌 결정 이후, 가해자는 피해자를 법정으로 불러들여 진술 신빙성을 공격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재판부가 피해자 진술을 믿을 수 없다고 판단하면, 무죄를 선고받을 확률이 커지기 때문이다.
한국일보는 8일 헌재의 위헌 결정이 재판 쟁점으로 떠오른 성폭력 사건 15건을 분석했다. 피고인들은 미성년 피해자의 수사기관 진술에 대한 증거 채택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미성년 피해자 증언의 신빙성 판단 기준 △위헌 결정의 효력이 미치는 범위 △피고인이 증거 채택에 동의했다가 위헌 결정 이후 부동의로 바꾸면 이를 인정해야 하는지 여부가 쟁점이 됐다.
결과적으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흔들어 무죄를 받아보려는 피고인 측 전략은 대부분 실패한 것으로 나타났다. 15건 중 14건이 유죄로 확정됐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수사기관 진술과 피해자의 법정 증언이 다소 일치하지 않더라도 대체로 진술 신빙성을 인정했다. 지난해 7월 13세 미만 미성년자 추행 등 혐의로 징역 7년을 확정받은 A씨 사건이 대표적이다. 피해자 B양은 증인으로 출석해 "가만히 있었다"는 수사기관 진술과 달리 "'(추행을) 하지 말라'고 한 것 같다"고 진술했다. 또 수사기관에서는 말하지 않았던 피해 사실을 법정에서 추가로 밝혔다.
재판부는 "신빙성을 의심할 만큼 주요 부분이 변경되지 않았다"고 봤다. 새롭게 나온 진술 역시 "집중적인 반대신문을 받으면서 피해를 상세하게 설명했을 뿐"이라며 피해자 입장을 이해했다. 지방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법원은 피해자 증언이 수사기관 진술과 일관성이 있다면 유죄로 판단해 왔다"고 분석했다.
"위헌 결정 효력이 미성년 중증장애인에게는 미치지 않는다"는 판결도 있었다. 부산고법은 지난해 9월 장애인 강간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C씨에게 징역 7년을 선고하면서 "피해자가 신체 또는 정신 장애로 사물을 변별하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미약하다면 위헌 결정 효력이 미치지 않는다"며 "(중증장애) 피해자와 (비장애) 미성년 피해자에 대한 보호 필요성이 동등하다고 볼 수는 없다"고 밝혔다.
법원은 또 피고인이 원심에서 피해자의 수사기관 진술에 대한 증거 채택에 동의했다면, 위헌 결정 이후 입장을 바꿔 부동의했더라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수사기관 진술을 제외하더라도 나머지 증거만으로 유죄가 인정된다는 판결도 있었다. 신진희 변호사는 "미성년자들이 증언하면 무조건 충격에 휩싸일 것이라는 생각은 편견"이라며 "주변 사람들이 가해자 단죄를 원하는 미성년자를 응원하고 격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일하게 무죄가 확정된 판결은 피해자의 증언 거부로 피해 진술이 증거로 채택되지 않은 사건이다. 문혜정 여성변호사회 변호사는 "피해자 진술로 유·무죄가 갈리는 사건이 대부분이고, 친족 성폭력 사건은 진술 회유 가능성도 있다"며 "위헌 결정에 따른 법정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유관기관이 해결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