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 논문 써 줘"... 업무 외 사적 지시, 어디까지 해야 하나요?

입력
2023.02.16 04:30
15면
직장인 16% "부당지시 경험했다"
타깃은 신입사원 "찍힐까 두려워"
계약서 명시된 업무, 시간 지켜야

편집자주

월급쟁이의 삶은 그저 '존버'만이 답일까요? 애환을 털어놓을 곳도, 뾰족한 해결책도 없는 막막함을 <한국일보>가 함께 위로해 드립니다. '그래도 출근'은 어쩌면 나와 똑같은 문제를 겪고 있는 노동자에게 건네는 전문가들의 조언을 담습니다.

"대학원 과제가 있는데 민수(가명)씨가 좀 해줘야겠어. 민수씨가 이쪽 전공 아닌가?"

직장인 김민수씨는 최근 결재를 받으러 임원실에 갔다가 황당한 지시를 받았다. "성적 평가를 받을 텐데 직접 하셔야 되지 않겠냐"며 애써 거절했지만, 임원은 굽히지 않았다. 김씨는 임원실을 나서자마자 회사 사람들에게 부당하다고 토로했다. 그러나 모두 한숨만 쉴 뿐 목소리 내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팀장이 과제를 해줄 다른 사람을 찾는 것으로 상황을 무마했다.

한 중소기업에 취직한 정모(28)씨는 출근시간 전과 점심시간, 남들보다 일찍 회사에 들어와 고무장갑을 낀다. 개인 책상, 싱크대에 있는 직원들의 머그컵과 텀블러를 설거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직접 씻는 사람도 있지만, 이젠 사람들이 싱크대에 컵을 두고 가는 일도 다반사다. "제가 식기세척기인가 싶을 때도 있어요. 기분 나빠도 과장님이 시키셨는데 따를 수밖에 없죠. 윗사람한테 밉보이긴 싫거든요."

"이런 일 하러 입사했나" 자괴감

이지수(가명)씨는 아침저녁마다 대표의 운전기사 역할을 하고 있다. 눈이 쌓인 날에도 대표가 사는 집에 들러 대표 가족의 차 위에 쌓인 눈까지 치워야 한다. 대표의 아내가 주말농장에서 키운 작물을 팔아 수익화하는 것도 지수씨 몫이다. 회사가 아닌 곳에서, 근무시간도 아닌 때에 일하지만 지수씨가 추가로 받는 돈은 제로(0)다. 지수씨는 "이런 일을 하러 대학까지 나와 입사한 건지 자괴감이 든다"고 토로했다.

피해자는 대부분 연차가 낮은 신입사원이다. 3년 차 직장인 김모(30)씨는 신입사원 시절 상사 아들의 영어 숙제를 해줬다. 김씨는 "요즘은 연차도 차고, 부서가 바뀌면서 거절하는 법을 배웠지만 신입사원 때는 뭐든 따라야 한다는 압박이 강했다"며 "상사 아들이 대학 입시 자기소개서까지 봐 달라고 하기 전에 팀을 옮겨 다행"이라고 쓴웃음을 지었다. 장모(28)씨는 막내 시절 "아침마다 부장의 어깨 마사지를 하고 흰 머리카락을 뽑아야 했다"며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혹시나 회사에 힐까 봐 어쩔 수 없이 했다"고 털어놨다.

상사의 사적인 업무 지시는 이들만의 일이 아니다. 직장갑질119가 지난해 12월 7일부터 일주일간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16.5%가 최근 1년간 사적 용무 지시를 포함한 부당지시를 받은 적이 있다고 답했다. 부당지시 경험률은 △폭행·폭언(9.4%) △모욕·명예훼손(15.6%) △따돌림·차별(10.6%) △회식, 장기자랑 등 업무 외 강요(11.2%)를 제치고 가장 높았다.

대표 가족 갑질해도 과태료 처벌

그렇다면 과연 어디까지가 괴롭힘일까. 고용노동부가 발간한 매뉴얼(안내서)에는 '사적 심부름 등 개인적인 일상생활과 관련된 일을 하도록 지속적, 반복적으로 지시하는 것'을 직장 내 괴롭힘으로 간주한다고 나와 있다.

여기에 더해 ①사용자나 근로자가 직장 내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②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긴 지시로 ③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유발시켜 근무 환경이 악화했다는 걸 증명해야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할 수 있다.

문제는 '업무상 적정 범위를 어떻게 볼 것이냐'다. 권남표 직장갑질119 노무사는 "계약서에 적힌 업무 시간과 업무 범위를 기반으로 보는 게 가장 명확하다"면서도 "한국의 근로계약서 대다수가 업무 '등'으로 불분명하게 적혀 있어 문제가 계속되고 있다"고 꼬집었다. 결국 회사에서 정한 취업규칙과 사규 외에는 업무상 관행, 상식선에서 판단할 수밖에 없다.

지수씨처럼 사용자의 가족이나 친척이 부당한 지시를 내렸다면 신고할 수 있을까. 현행법상 가능하다. 근로기준법에서는 사용자의 배우자나 4촌 이내 친인척이 괴롭혀도 1,000만 원의 과태료를 부과한다. 사장, 본부장 또는 이사급의 사용자가 아니더라도 근로자를 관리 감독하는 팀장급의 상사라면 처벌 대상으로 볼 수 있다.

다른 회사에 잠시 동안 파견된 근로자도 괴롭힘을 당했다고 신고할 수 있다. 파견 중인 근로자의 업무를 감독하고 지휘하는 사업주 또한 직장 내 괴롭힘 행위자로 인정된다.

업무 외 노동, 수당 쳐줄까... 신고 절차는

업무 시간 외에 일을 하게 만들고 돈을 주지 않는 건 명백한 '임금 체불'에 해당한다. 회사가 아닌 공간도 괴롭힘이 성립한다. 전문가들은 주말처럼 업무 시간이 아닐 때, 위계 관계로 사적 업무를 해줄 수밖에 없었다는 증거를 만들어 놓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지시를 거절했던 녹음이나 메시지가 있다면 더욱 도움이 될 수 있다. 업무 외 노동에 대해 상대방의 육성이 담긴 녹음이나 영상 자료를 확보하는 것이 좋고, 그마저도 안 되면 주변인의 증언을 받아야 한다.

사용자, 즉 본부장이나 이사급 이상 관리직이 괴롭혔다면 고용노동부 고용노동청에 바로 신고할 수 있다. 이후 감독관이 현장에 나가거나 신고자가 제출한 서류로 조사를 진행한다. 회사가 직접 조사하도록 지시할 수도 있다. 만약 관리직보다 낮은 단계의 상사가 괴롭혔다면 인사팀 같은 사내 창구를 통한 조사를 지시한다. 조사가 미진하다면 고용노동부에 다시 신고할 수도 있다.

"사적 인간관계로 부당업무 맡아선 안 돼"

전문가들은 사적 업무 지시에 대해 가급적 문제 제기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여전히 팽배하다고 지적한다. 2019년 취업포털 커리어가 직장인 29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사적 심부름’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 67.5%가 상사의 개인적 부탁이나 심부름을 대부분 들어줬다고 답했다. 그 이유로 '거절할 정도의 어려운 일이 아니라서(50%)', 나를 개인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에 부탁한 것이라고 생각해서(20.9%)', '나중에 불이익을 당할 것 같아서(19.8%)' 등을 들었다. 지시에 응한 후 상사와 개인적으로 친밀해졌거나, 실수가 있어도 특혜를 봐줬다는 응답도 있었다.

권 노무사는 "사적인 인간관계에 휘둘려 부당한 업무 지시를 따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만들어진 것"이라며 "근로 계약은 약속한 업무를 시간 내에 해낸 뒤 그 대가로 돈을 받는 것으로, 계약 외의 업무는 지시할 수 없다는 인식이 자리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현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