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4대 정유사가 지난해 사상 최대 실적을 거두고도 대놓고 기뻐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횡재세 논란을 의식한 듯 몸을 낮추고 있다. 현대오일뱅크가 지난해 말 기본급의 1,000%를 성과급으로 주고, GS칼텍스는 연봉의 50%의 성과급을 결정하면서 논란이 고개를 들었다. 횡재세 필요성을 강조하는 이들은 유가 급등과 정제 마진 강세로 얻은 이득을 난방비 폭등으로 힘겨워하는 취약계층을 위해 쓰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반면 정유업계는 시장 논리에 어긋난다고 맞서고 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스스로 난방비 지원금을 출연했다.
정유 4사가 발표한 지난해 실적은 모두 역대 최대치였다. 가장 먼저 발표한 에쓰오일은 전년 대비 59.2% 증가한 3조4,081억 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했고, SK이노베이션은 129.6% 증가한 3조9,989억 원, 현대오일뱅크는 155.1% 늘어난 2조7,898억 원 영업이익을 올렸다. 13일 마지막으로 발표한 GS칼텍스 영업이익 역시 3조9,795억 원으로 전년 대비 97% 증가했다.
정유사들은 곳간을 채운 상황에서 다시 불붙은 횡재세 논의가 달가울 리 없다. 정유사가 어려울 때 국가가 도와준 것도 아닌데 큰 이익을 내자 이를 걷어 가겠다고 움직이는 건 시장 논리와는 맞지 않다는 얘기다. ①지난해 4분기 실적이 적자로 돌아선 상황에서 ②올해 영업환경 또한 불투명하고 ③친환경 신사업 신규 투자도 확대해야 하는 실정이라는 게 이들의 '횡재세 반대' 근거다.
정유 4사는 실적 발표 시즌에 맞춰 취약계층 난방비를 지원하겠다며 수백억 원대 기탁금을 전했다. 8, 9일 이틀에 걸쳐 SK에너지가 150억 원, 현대오일뱅크와 GS칼텍스는 각각 100억 원을 내놨고, 에쓰오일은 10억 원을 한국에너지재단 등에 맡겼다. 업계 안팎에서는 ①혹한기가 지난 ②실적 발표 시즌에 ③약속한 듯 기부를 발표하자 "횡재세 논란을 사전 차단하기 위한 움직임"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횡재세 논란이 불거진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 상반기에만 정유 4사가 12조 원 넘는 흑자를 내면서 정치권을 중심으로 횡재세를 걷자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하반기 국제 유가가 급락하면서 논란은 수그러들었다. 한덕수 국무총리도 횡재세 도입은 적절치 않다며 선을 그었다. 그러던 중 새해 들어 '난방비 폭탄' 논란과 국내외 정유사의 연간 실적 발표가 겹치면서 정치권을 중심으로 횡재세 논란에 다시 불을 지피는 모습이다.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도 횡재세 도입 취지에 공감했다. 꼭 정치권에서 정유사를 특정해 요구하는 횡재세 방식은 아니더라도 큰 노력 없이 천문학적 수익을 쌓는 기업들의 세율을 높여 취약계층에 지원해야 한다는 얘기다. 참여연대 관계자는 "법인세와 소득세의 과세표준 구간 중 일정 상위 구간 세율을 한시적으로 올리는 '사회연대세'를 새로 만들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등으로 피해를 입은 취약계층을 돕는 쪽으로 정책 방향이 흘러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유업계에서는 실제 서민층 난방용 에너지로 쓰이는 건 액화천연가스(LNG)나 액화석유가스(LPG)라며 정유사들만 콕 집은 것은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모든 회사가 친환경 에너지 생산을 위한 연구 및 시설 투자 계획을 세웠다"며 "써야 할 돈이 많은 상황이라 횡재세 논의에 대한 거부감이 크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