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경제학(The Quarterly Journal of Economics)’은 세계적으로 가장 저명한 경제학 학술지이다. 그런데 어느 날 이 학술지에 무명의 영국 상인이 쓴 오래된 편지 하나가 이례적으로 유수의 논문들과 함께 게재되었다. 무려 1676년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이 편지는 근대 은행의 기원을 밝히는 귀중한 사료이다. 금세공업자들과 많은 거래를 했던 편지의 저자는 아들을 금세공업자로 키우기 원하는 지인에게 전통적인 금세공업이 어떻게 은행업으로 바뀌고 있는지 설명하고 있다.
1640년 잉글랜드는 국채를 상환하지 않고 부도에 빠졌다. 또한 1642년부터 10년간 영국 내전(Civil War)이 발발하면서 국가재정과 화폐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졌다. 이에 수많은 사람들이 금이나 현금을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나섰다. 이러한 수요에 부응하여 금세공업자들은 사람들이 맡긴 재산을 금고에 안전하게 보관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현금을 금세공업자에게 예치하면 사람들은 매번 시장에서 상품을 살 때마다 대금을 치르기 위해 금세공업자에게 돌아가서 돈을 인출해야 했다. 이러한 불편을 줄이기 위해 금세공업자들은 예금증서(bank note)를 발급하기 시작했다. 이 예금증서의 소지자가 증서를 제시하면 금세공업자는 증서에 적힌 금액만큼 현금을 지급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물건을 살 때 현금 대신 예금증서를 지급했고 판매자는 이를 받아들였다. 예금증서가 일종의 화폐로서 기능하기 시작한 것이다.
금세공업자가 현금을 보관해주고 이를 담보로 예금증서를 발행하자 사람들은 더 이상 예치금을 자주 인출할 필요가 없어졌다. 결과적으로 주인이 찾아가지 않은 많은 자금이 금고에 쌓였고, 금세공업자들은 자연스럽게 이러한 자금을 재원으로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기 시작했다. 금세공업자가 은행으로 변화한 것이다. 다수의 영국 은행들이 금세공업자로 출발해 현존하고 있고, 이 중에는 우리나라 4대 시중은행을 합한 것보다 더 큰 초대형 은행 바클레이스(Barclays)도 있다.
금세공업자 이야기는 현재와 상관없는 옛날이야기에 불과할까? 그렇지 않다. 최근 금융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인 디지털 금융혁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금세공업자 이야기에서 중요한 시사점은 첫째, 지급결제 서비스의 혁신이 완전한 은행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제공된 믿을 만한 자금보관 서비스와 국가화폐보다 신뢰할 만한 민간화폐인 예금증서의 발행은 지급결제 서비스의 혁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많은 예금이 몰리고 이를 재원으로 대출을 하면서 금세공업자는 온전한 은행으로 발전한 것이다. 두 번째 시사점은 산업자본이 은행이 되면 안 된다는 통념, 즉 금산분리 원칙이 지급결제 서비스의 혁신을 통해 무너질 수 있다는 점이다. 금융회사가 아니었던 금세공업자는 자금보관, 예금증서 발행 등 지급결제 서비스의 혁신을 통해 자연스럽게 은행으로 변모했다.
이러한 두 개의 시사점은 현재의 디지털 금융혁신에도 적용될 수 있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기술과 금융을 융합한 중소형 회사인 핀테크가 부상하고 있고, 아마존, 네이버 등 소위 빅테크도 금융서비스를 출시하고 있다. 이러한 금융서비스 중 가장 먼저 광범위하게 제공되고 있는 서비스는 바로 지급결제 서비스이다. 네이버페이, 카카오페이, 삼성페이 등 간편결제 서비스는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또한, 네이버, 카카오 등 국민에게 은행보다 친숙한 인터페이스를 제공하는 빅테크는 간편결제를 중심으로 전체 지급결제 분야에서 기존 은행을 빠르게 추격하고 있다. 2016년부터 21년까지 최근 5년간 간편결제 시장은 8배 증가했고, 핀테크·빅테크 등 전자금융업자의 시장점유율은 두 배 상승하여 과반을 차지한 반면, 기존 은행의 시장점유율은 반토막이 났다.
앞으로 디지털 지급결제 서비스가 더욱 확대되면 사람들은 지급결제 명목의 자금을 은행이 아닌 전자금융업자에게 맡기게 될 것이다. 아직은 전자금융거래법의 규제로 인해 전자금융업자가 예금을 직접 유치할 수는 없지만 향후에는 직간접적으로 예금유치가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렇게 되면 대중으로부터 자금을 유치하고 이를 재원으로 대규모 대출을 공급하는 은행으로 자연스럽게 발전할 것이다. 이미 중국의 알리페이, 미국의 스퀘어, 영국의 레볼루트 등 초기 핀테크 회사들은 지급결제에서 출발하여 은행으로 확대되었다. 이처럼 지급결제를 중심으로 한 디지털 금융의 혁신은 기술기업들이 새로운 은행으로 부상하고 기존 은행들은 설자리를 점점 잃어가는 형태로 기존 금융산업의 구조를 크게 변화시킬 것이다.
한편, 디지털 금융의 혁신은 전통적인 금산분리 원칙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 될 수 있다. 비금융사업자였던 금세공업자가 지급결제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은행이 된 것처럼, 네이버, 카카오, 아마존, 애플 등 비금융 기술기업들이 디지털 지급결제 서비스를 필두로 금융서비스의 영역을 확대하면서 결국 은행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처럼 금산분리 원칙이 오랫동안 지켜져 왔던 미국에서도 최근 규제완화를 통해 비금융 기술기업에 조건부로 은행면허를 발급하고 있다. 산업자본이 은행을 소유하면 대주주의 사금고화와 같은 문제가 우려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술과 금융의 융합을 통해 소비자의 편익이 증가하고 새로운 금융상품과 서비스가 출시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최근 각국은 후자에 방점을 두고 대주주 사금고화 등 여러 문제에 대한 보완책을 마련하는 것을 조건으로 기술기업이 은행화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현대 금융은 더 이상 돈을 직접 주고받는 형태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거의 모든 거래가 데이터베이스화되어 비현금 거래로 이루어진다. 더욱이 가상화폐, 메타버스, MZ세대가 부상하는 시대적 흐름을 고려할 때 금융과 정보기술(IT)의 융합은 거부할 수 없는 대세이다. 이미 수년 전 자신들은 IT회사라고 선언했던 미국의 유명 투자은행 골드만삭스와 같이, 우리나라 은행들도 금융과 기술을 보다 적극적으로 융합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디지털 금융의 혁신은 금산분리 원칙을 무너뜨리면서 금융시스템에 불안을 초래할 수도 있다. 또한 혁신을 장려한다는 미명 아래 핀테크·빅테크는 기존 은행보다 느슨한 규제를 받으면서 수익은 더 많이 창출하는 등 규제차익을 누린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그렇다면 향후 디지털 금융혁신 시대에 금융정책은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 한편으로는 디지털 금융혁신을 촉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규제차익을 줄이고 금융소비자를 적절히 보호하며 금융안정을 유지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과제들은 상호모순적인 측면이 있어서 동시에 달성하기 어렵다. 규제를 강화하면서 혁신을 촉진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혁신과 규제 중 어느 것 하나를 포기할 수도 없다.
한 가지 대안은 단계적 접근방식이다. 디지털 금융회사가 발전의 초기단계에 있는 경우 혁신에 방점을 두고 규제를 완화한다. 그러나 발전단계가 심화될수록 혁신보다는 금융소비자 보호와 금융안정에 점점 더 많은 가중치를 주고 그에 걸맞게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 각 단계를 명확히 구분하고, 각 단계에 어떠한 규제모형을 적용할지 로드맵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글머리에서 언급한 무명의 영국 상인은 편지를 이렇게 마무리하고 있다. “금세공업자는 남이 맡긴 돈을 빌려주고 고리의 이자를 취하므로 부도덕하고, 대출받은 사람들에게 큰 곤경을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적절한 이자를 취하도록 하고, 갚을 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대출하도록 하는, 일정 수준 이상의 금융건전성 규제가 필수적이다. 현대판 금세공업자 은행이 될 디지털 금융회사들도 이러한 문제를 초래하지 않도록, 발전단계별로 차등화된 금융규제가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황순주 KDI 거시금융정책연구부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