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까지 면박 줄 일은 아니었다. 나도 좀 보아달라며 구애했다가 호되게 당한 입장에선 이토록 무안한 일도 없다. 마땅치 않은 상대라도 이렇게까지 능멸해선 안 된다. 이지메에 혼이 나간 나경원 전 의원을 가해자 측이 불러내 공개지지를 강권한 것은 잔인한 2차 가해였다. 그의 처연한 표정에선 덫에 걸린 학폭 피해자 같은 모습이 보일 정도였다. 졸지에 ‘국정운영의 적’이 된 안철수 의원도 마찬가지다. “김기현 대표님 사퇴하면 안 됩니다” 따위 농담에선 오랜 대권주자의 풍모 대신 안쓰러운 허세만 보였다.
결국 국민의힘은 김기현 대표체제로 갈 것이다. 비판은커녕 혹시 있을 이견의 싹까지 확실하게 잘라내는 분위기에서 다른 변수가 생길 이유도 시간도 없다. 총선도 그렇게 친윤 후보들로 대거 물갈이돼 치러질 것이다. 지난해 말 특별사면됐던 친윤 검사장 출신 인사는 이튿날 곧바로 당협위원장이 됐다. 실제로 여러 지역구에서 벌써 상당수 검찰 출신 인사들이 총선 유력 후보군에 올라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일련의 과정이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대통령과 뜻을 같이하는 인사들만으로 정국을 운영해나가겠다는 뜻이다.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거대 야당에 사사건건 발목 잡히는 상황에서 내부마저 일사불란하지 않으면 국가운영을 제대로 할 수 없겠다는 위기감의 발로다. 더욱이 아랍에미리트(UAE) 경제외교 성과까지 낸 입장에서 국내 정치공방은 거추장스럽고 짜증 나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착각이다. 예전 이명박 전 대통령이 대권을 쥔 직후 사석에서 호기를 보인 적이 있었다. “내 경쟁 상대는 오직 부시 대통령, 후진타오 주석, 아베 총리다. 국내 정치인은 관심 없다.” 그러나 MB의 포부를 꺾은 건 개인비리에 더한, 거친 국내정치 관리였다. 국가위상 제고, 금융위기 조기극복 등의 성과들도 평가받지 못했다. 여당이 국회 과반수였는데도.
윤 대통령은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불리한 환경이다. 반이(李)·반문(文) 정서에 기대 박빙으로 이겼음에도 당시 어려운 선택을 했던 중도층조차 다시 붙잡지 못하고 있다. 이 판국에 내부 편까지 가른다. 지금은 소수의 자기진영을 다질 때가 아니라 도리어 적극적으로 외연을 확장해야 할 때다.
따지고 보면 이상민 행안부 장관 탄핵건도 같은 맥락이다. 이재명 수사에 대한 야당의 무리한 맞불놓기라는 걸 알면서도 ‘그럴 만도 하다’는 방관적 정서가 태반이다. 왜 그를 그렇게까지 감싸야 하는지 납득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내 사람 지키기' 고집 말고는 이해할 방법이 없다. 이 일로 상당수가 지지를 거뒀듯 당권경쟁을 보며 또 많은 이들이 머리를 젓고 있다.
윤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우리 정치가 제 기능을 못 하는 가장 큰 원인으로 반지성주의를 지목했다. 그리고 다수 힘으로 상대 의견을 억압하는 것이 반지성주의라고 명쾌하게 정의했다. 취임사엔 승자독식 반대와 자유로운 정치적 권리 보장 등의 내용들도 담겼다. 민주당을 겨냥했지만 문자 그대로 그 자신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다. 당 운영의 획일성은 이 약속들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되짚기도 구차하지만 지난 정권의 실패는 문재인 대통령의 화려한 취임사에 반한 정치행위에서 비롯됐다.
윤 대통령이 선택된 것은 서툴지만 적어도 원칙에 대한 뚝심에다 함부로 허언을 내뱉진 않으리란 믿음에 상당 부분 바탕한 것이다. 어차피 국민의힘 전당대회는 되돌리기 힘든 흐름이지만 윤 대통령은 이제부터라도 자신이 쓴 취임사를 자주 읽어보기 바란다. 중도층을 되잡아 총선에서 승리하고 끝내 성공한 정권을 만들 수 있는 방안이 그 안에 다 담겨 있다. 전 정권과의 확실한 차별화도 그 이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