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최고 존엄 김정은의 딸 주애를 위한 열병식이었다. 주석단 가운데 자리에서 평양 김일성 광장을 가로지르는 북한의 첨단 전략무기들을 내려다보며 '백두혈통'의 위엄과 존재감을 뽐냈다. 할아버지뻘인 당과 군의 최고위층은 앞다퉈 어린 소녀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존경하는 자제분'을 극진히 예우했다.
9일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주애는 전날 저녁 열병식 등장부터 남달랐다. 검은색으로 통일한 모자와 코트, 장갑 차림으로 아버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손을 잡고 레드카펫을 밟으며 행사장에 들어섰다. 어머니 리설주도 곁에 있었지만, 이들 부녀와는 한 걸음쯤 뒤에서 걸었다. 등장인물의 동선과 위치, 복장 등을 세밀히 계산해 연출하는 북한 열병식 특성에 비춰 주애에 대한 군의 충성을 강조하고 이를 주민들에게 과시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주애는 열병식 내내 카메라 앵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부모와 함께 주석단 귀빈석을 차지하고는 아버지와 대화하며 웃거나 열병식을 지켜보며 박수를 쳤다. 통신은 조용원 조직비서(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와 리일환·김재룡·전현철 등 당 중앙위 비서들이 "존경하는 자제분을 모시고 귀빈석에 자리 잡았다"고 전했다.
7일 인민군 창건 75주년 기념연회에 이어 열병식까지 이틀 연속 주애가 행사의 중심에 등장한 것이다. 북한 권력 차기구도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는 장면이다. 정성장 세종연구원 통일전략연구실장은 “노동신문이 리설주보다 주애의 이름을 앞에 썼는데 북한에서는 위상에 따라 호명 순서가 정해진다”면서 “이틀 연속 주애를 존경하는 자제분이라고 표현해 개인숭배의 시작을 알렸다”고 말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북한 당국이 그를 후계자로 내세우고 있다는 가장 분명한 신호"라고 해석했다.
반면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주애는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7형’ 시험 발사 등 군사 현장에만 나타났다”면서 “강한 군사력으로 후대의 행복을 지키겠다는 게 김정은의 뜻인데, 이를 대표하는 존재로 주애를 활용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후계자라기보다 단순한 상징일 뿐이라는 분석이다. 통일부 관계자는 "후계구도는 이른 감이 있지만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의 '할아버지 따라하기'도 눈에 띄었다. 열병식장에 검은 중절모와 코트 차림으로 등장해 군 병력과 장비를 사열했다. 할아버지인 김일성 주석의 대표적인 옷차림을 쏙 빼다 박은 셈이다. 북한 주민들이 여전히 향수를 느끼는 절대적 존재인 김 주석과 김 위원장을 동일시해 충성심을 끌어올리려는 계산으로 보인다.
이날 열병식에는 한때 북한 군부서열 1위 총정치국장을 맡았다가 좌천된 황병서가 김 위원장 곁을 지켜 눈길을 끌었다. 황병서는 2017년 10월 당 조직지도부의 검열로 해임됐지만, 이틀 전 연회에 차수(원수와 대장 사이) 계급장을 달고 등장해 복귀를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