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범고래는 왜 연쇄 살인범이 되었을까?

입력
2023.02.10 04:30
15면

편집자주

어렵고 낯선 과학책을 수다 떨 듯 쉽고 재미있게 풀어냅니다. ‘읽어본다, SF’를 썼던 지식큐레이터(YG와 JYP의 책걸상 팟캐스트 진행자) 강양구씨가 <한국일보>에 4주마다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미국 서부의 한 해양 테마파크에서는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범고래 쇼를 볼 수 있었다. 조련사의 명령에 따라서 범고래가 점프도 하고, 관객의 박수 소리에 맞춰서 꼬리로 물도 튀겼다. 돌고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덩치가 크지만, 그 못지않게 귀여운 범고래 쇼는 이 테마파크를 유명하게 한 원동력이었다.

10년 전쯤 그곳에서 범고래 쇼를 여러 차례 보다가 흥미로운 사실을 눈치챘다. 공연 시나리오가 분명히 정해져 있을 텐데, 실제 공연 모습은 들쭉날쭉하다. 앞서 공연에서 분명히 세 번 점프하던 범고래가 이번 공연에서는 한 번만 한다. 꼬리로 물을 튀기는 일에도 짜증이 잔뜩 묻어 있다. 조련사는 먹을거리를 주는 등 마음을 돌려보려 애를 쓰지만, 뜻대로 안 된다.

이렇게 수족관에 갇힌 범고래는 “시시때때로 반항하고 태업한다”. 그러다 무엇인가 균형이 깨지면 말 그대로 폭주한다. 한 범고래는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1991년부터 2010년까지 거의 10년 주기로 세 사람을 살해했다. 마지막 희생자는 그 범고래를 누구보다 아꼈던 조련사였다.

기왕 범고래 이야기로 시작했으니, 다른 이야기도 해보자. 범고래는 명실상부한 바다의 최상위 포식자다. 자기보다 몸집이 훨씬 더 큰 혹등고래나 심지어 지구에서 가장 큰 포유류인 대왕고래도 집단 사냥해서 잡아먹는다. 심지어 이 범고래는 인간과 협력해서 고래를 사냥한다. 호주에서 20세기 초까지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범고래가 혹등고래 같은 사냥감을 추격한다. 잡히면 끔찍한 꼴을 당할 테니, 혹등고래는 필사적으로 도망친다. 사실 범고래는 몸길이 20m의 이 혹등고래를 함정으로 몰아넣는 중이다. 범고래를 피해서 달아난 탈출로의 끝에는 허접한 보트를 타고 있는 인간 어부가 있다. 그들은 범고래에 쫓겨서 지칠 대로 지친 혹등고래의 급소에 작살을 꽂는다.

이제 수확물을 ‘공정하게’ 나눌 차례다. 인간이 일단 자리를 비키면 범고래는 좋아하는 혀와 입을 비롯한 살코기를 해치운다. 인간은 범고래가 남긴 혹등고래의 사체를 수거해서 기름과 같은 돈 되는 부위를 떼 낸다. ‘못 믿을 동물인’ 인간이 약속을 안 지킬 때도 있다. 그러면 범고래는 즉시 이런 “반칙에 항의한다”.

우리는 흔히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지배-피지배’처럼 단순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어떤 인간은 그런 관계를 더욱더 강화해 동물을 착취하려 하고, 다른 인간은 그 관계를 좀 더 평등한 관계로 바꾸고자 애쓴다. 그런데 인간-동물 관계의 이모저모를 따져보면 그 실체는 훨씬 복잡하다. 동물은 그저 인간의 처분만 기다리는 그런 수동적인 존재였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앞에서 소개한 범고래 이야기는 오랫동안 인간-동물 관계를 공부하고 취재해온 저널리스트 남종영이 펴낸 '동물 권력‘(북트리거)에 나온다. 이뿐만이 아니다. 한니발과 함께 로마를 공격하러 알프스산맥을 건넜다는 코끼리부터 아프리카 초원의 왕으로 전 세계의 관심을 받다가 하룻밤 만에 목이 잘려 미국 관광객의 박제 트로피가 된 사자까지. 흥미로운 이야기가 꼬리를 문다.

그러면서 저자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다. 인간과 동물이 지금까지 맺어 온 관계는 지속 가능한가. 인간과 동물의 경계는 또렷한가. 이 책을 읽고 나면 이런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머뭇거릴 수밖에 없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디플롯) 같은 책이 재미있었던 사람이라면 이 책으로 인간-동물 관계에 대한 고민을 더욱더 확장해보기를 권한다.

참, 앞에서 언급한 연쇄 살인은 범고래 쇼를 중단하고 나아가서 돌고래 등 고래류를 수족관에 가둬두고 쇼를 강제하는 관행에 경종을 울렸다. 그렇다면, 이 살인 고래는 어떻게 되었을까? 21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동물로 역사에 기록될 이 고래 이야기는 이 책의 3부에서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강양구 지식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