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번역 기술 활용도 번역가의 능력인가. 고도화된 AI 시대에 번역가란 직업은 살아남을 것인가.
한국어가 유창하지 않은 일본인이 AI 번역기의 도움을 받아 국내 문학번역상을 수상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AI 시대의 번역'에 대한 이 같은 질문들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9일 한국문학번역원에 따르면 지난해 말 발표된 2022 한국문학번역상 웹툰 부문 신인상 수상자가 한국 웹툰 '미래의 골동품 가게'를 일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 네이버 AI 번역기 '파파고'를 활용했다. 한국어 학습 기간이 1년 남짓이라 한국어 수준이 높지 않지만 일본어 의역을 매끄럽게 해, 수상 직후까지도 심사위원단은 이 같은 사실을 알지 못했다.
논란이 불거지자 수상자는 "작품을 통독한 뒤 보다 정확한 번역을 위해 파파고를 사전 대용으로 사용했다"며 논문 검색 등 다양한 자료를 참고했다는 점을 번역원을 통해 해명했다. 그럼에도 이는 최근 AI 챗봇 '챗GPT' 표절 논란 등과 맞물려 AI 번역(기계 번역) 활용에 대한 논쟁에 불을 댕겼다.
번역원은 이번 사례를 "AI 번역의 가능성과 수용 범위 등에 대한 공적 논의의 계기로 삼겠다"면서도 "신진 번역가를 발굴한다는 번역신인상 취지에 맞게 'AI 등 외부의 힘을 빌리지 않은 자력의 번역'으로 명확히 규정하는 등 제도를 보완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번역 전문가들은 오히려 번역상 기준 변경이 무의미한 조치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 번역 과정에 AI 활용 여부를 객관적으로 증명할 방법이 없고, 기계 번역(AI 번역) 후 사람이 최종 편집하는 포스트 에디팅(post editing) 방식은 이미 '정해진 미래'와도 같기 때문이다. 기계 번역과 '순수한' 사람의 번역을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한승희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특임교수는 "지난 5, 6년간 학계에서 기계 번역에 대한 수용 범위가 늘었다"며 "이제는 기계 번역 확산 이후 번역가란 직업의 변화 방향이 화두"라고 전했다.
기술 진보에 따라 번역가의 모습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송태욱 일본문학 전문번역가는 "장기적으로는 문학을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 기계 번역이 (사람을) 대체할 수 있지 않겠느냐"면서도 "단번에 기술(완성도)이 100%가 될 수 없으니 그 과정에서 번역가가 기계 번역을 활용하게 될 것"이라고 봤다. 기계 번역 결과물(초벌 번역)에 오역이 없는지 판단하고, 말맛을 살린 번역문을 만드는 등 창작의 영역이 번역가의 몫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보다 더 자국어(번역어) 능력이 번역가의 중요한 자질이 될 것"(민경욱 일본문학 전문번역가)으로 전망된다. 논란이 된 번역상 수상자 역시 자국어(일본어) 능력이 탁월해 최종 번역본이 높은 평가를 받은 셈이다. 번역가 교육도 AI 번역 기술을 잘 활용하고 협업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범사회적 합의가 시급한 의제들도 있다. 'AI 번역물은 창작물인가' '차별적 내용을 담은 번역물을 어떻게 거를 것인가'와 같은 질문들이다. 특히 오역을 막고 차별, 혐오적 내용을 걸러내기 위해서는 기술 개발부터 마지막 번역문 작성까지 전 단계에서 확실한 윤리적 기준 정립과 관계자들의 노력이 필요하다. 앞서 구글 번역에서 모든 3인칭을 남성형인 '그는(he)'으로 바꿔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이 같은 '편향성' 문제와 관련해 한 특임교수는 "넓게 보면 인문학의 문제"라면서 "AI 기술학자, 언어학자, 인문학자 등이 제대로 소통하고 융합하면서 풀어가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