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글씨, 밑줄, 낙서 가득한 헌책만 모으는 수상한 서점

입력
2023.02.09 12:30
14면
책 '헌책 낙서 수집광'

가벼운 손때, 본문의 밑줄, 책갈피를 끼워둔 자국, 속지에 쓴 짧은 독후감이나 일기. 헌책에 남은 온갖 흔적은, 책을 거쳐간 불상의 사람들을 상상하게 만든다.

2007년부터 15년 동안 서울 은평구에서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을 운영 중인 윤성근 작가가 쓴 신간 '헌책 낙서 수집광'은 어린 시절 할머니가 들려주는 구술 동화 같은 책이다. 졸려서 눈을 비비다가도 그 상상력의 끝이 궁금해 도무지 중단할 수가 없다. 스스로를 '책탐정', '이야기 수집가'라 부르는 저자는, 수집한 헌책 속의 낙서와 흔적에서 한때 책을 소유했던 이들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추리해낸다.

"많은 별들이 세상을 내려다봅니다. 그 많은 별들 중 가장 빛나는 사람이 되어보지 않겠습니까." 1982년 출간된 에리히 프롬의 '자기를 찾는 인간'에서 '사랑'을 논하는 페이지에 끼워져 있던 한 장의 연애편지. 당시 서울대생 박모씨에게 이화여대생 하모씨가 보낸 것이다. 40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늘 낭만적인 낙서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1978년 출간된 이종택의 '타인최면술' 187쪽 끄트머리에는 살벌한 글씨로 이런 문장이 남겨져 있다. "김○○ 부장 너는 내가 반드시 죽인다." 시대를 가리지 않는 상사에 대한 분노에 십분 공감하면서도, 도대체 무슨 사연일지 궁금해진다. 아주 작은 낙서를 보고도 저자는 셜록 홈스 뺨치는 추리와 맛깔난 글 재간으로 책과 사람에 얽힌 기묘한 이야기를 쏟아낸다.

손글씨를 쓰고, 밑줄을 긋고, 무언가 덕지덕지 붙어 있거나 찢어진 책은 아마 대형 중고서점에서는 상품 가치가 전혀 없는 것들일 테다. 그러나 버려지고 상처받은 책에 '이야기'라는 생명을 불어넣는 저자에게, 이런 책들은 보물이나 다름없다. '훼손도서, 타 서점 매입 불가 도서 대환영!' 오늘도 헌책방은 온갖 사연 담긴 책을 기다린다.



이혜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