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을 왜 좋아해요?"
"침묵 속에서 죽을힘을 다해 싸우는 게 좋아서요. 상대가 공들여 지은 집을 무너뜨려야 이기는 것도 마음에 들고."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고교 시절 학교 폭력 피해자인 동은(송혜교)은 가해자인 연진(임지연)을 향한 복수를 위해 바둑을 배운다. 어려서부터 바둑을 즐긴 연진의 남편 도영(정성일)에게 접근하기 위해서가 첫 번째 목적. 바둑돌 놓듯 침묵 속에서 사력을 다해 치밀하게 가해자가 이룬 일상을 하나둘씩 부숴 나가는 게 동은이 택한 복수의 방식이었다. 뿌연 담배 연기가 자욱한 뒷골목 범죄 영화와 달리 '더 글로리'는 곳곳에서 흑백의 바둑으로 복수의 비장미를 채색한다. "왕자님은 필요 없어요. 나랑 같이 칼춤 춰 줄 망나니가 필요하거든요." 아군과 적군이 극명하게 나뉘는 동은의 삶은 흑백만 존재하는 바둑판 같다.
"딱" "딱"…· 지난달 29일 오후 2시쯤 서울 종로구 낙원동 소재 P기원에선 단단한 나무 바둑판에 놓인 바둑돌 소리가 연달아 적막을 깼다. 82㎡(약 25평) 공간엔 20여 개의 바둑판이 깔려 있었고 그중 10개의 반상에선 이미 치열한 수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낡은 건물 3층에 있는 기원 문을 열고 들어섰더니 바로 앞에 놓인 테이블엔 동은이 도영과 바둑을 두는 장면이 컬러로 출력돼 A4용지로 여러 장 놓여 있었다. '더 글로리' 촬영이 바로 이곳에서 진행됐다. "1년쯤 됐나, 쌀쌀했던 날에 오후 6시부터 새벽 2시까지 찍었어요. 송혜교씨가 바둑 두는 걸 내내 지켜봤죠. 바둑 두는 장면만 10번 이상 찍더라고요." 기원에서 만난 박민규 원장의 말이다. 기원엔 요즘 부쩍 스타들의 발길이 잦아졌다. 유재석도 지난달 18일 tvN 예능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럭' 촬영차 이곳을 다녀갔다. 박 원장은 "옆 사무실이 바로 송해 선생이 생전에 매일 출근하던 '상록회' 사무실"이라고 했다. 기원 건물을 나서자 오른쪽으로 10여m가 채 안 되는 곳에 송해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드라마 속 바둑 촬영은 어떻게 이뤄졌을까. 2021년 11월, 대한바둑협회로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바둑 촬영 자문 좀 해 주실 수 있을까요?" '더 글로리' 제작진에게서 온 협조 요청이었다. 정재우 대한바둑협회 과장은 본보 통화에서 "송혜교와 정성일이 바둑을 한 번도 둬 본 적이 없다고 해서 양 손가락에 바둑돌을 껴 바둑판에 놓는 자세부터 알려줬다"며 "대본에 맞게 써둔 기보를 보고 배우들이 바둑돌을 놓는 순서를 현장에서 10수 이상 외운 뒤 촬영했다"고 말했다. 도영이 자주 가는 기원을 찾아가 동은이 그와 내기 바둑을 두고 이기는 기보는 대본에 맞춰 협회가 직접 짰다. 정 과장은 "'나는 바둑을 빨리 배웠어, 연진아. 목적이 분명했고 상대가 정성껏 지은 집을 빼앗으면 이기는 게임이라니 아름답더라'는 대사에 맞춰 집을 서로 지어가는 과정에서 동은이 상대가 만든 집을 부숴 이기는 방식으로 기보를 만들어 촬영했다"고 제작 뒷얘기를 들려줬다. 바둑에도 기풍이 있다. '돌부처'라 불린 이창호 9단이 치밀한 수비 바둑에 능했다면 이세돌 9단은 저돌적 공격형으로 통했다. 유경민 대한바둑협회 사무처장은 "20여 년 동안 복수를 준비한 동은의 서사를 고려해 바둑도 처음부터 달려드는 게 아니라 차분하게 쌓아가면서 결정적 노림수를 작렬시키는 스타일로 기풍을 잡았다"고 했다.
'더 글로리'에 이어 올 기대작 중 하나인 넷플릭스 영화 '승부'도 바둑을 다룬다. 이병헌과 유아인이 각각 조훈현 9단과 이창호 9단 역을 맡아 스승과 제자이자 라이벌이었던 한국 바둑 두 전설의 피할 수 없는 승부를 그린다. 가로·세로 50cm가 채 안 되는 작은 '판'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수 싸움은 해외에서도 인기다. 보육원에서 자란 베스 하먼(안야 테일러조이)이 불우한 환경을 딛고 남성들이 지배하는 체스판에서 그랜드마스터가 되는 여정을 그린 '퀸스 갬빗'(2020)은 공개 4주 만에 세계 넷플릭스 6,200만 계정의 시청자가 봤다. '오징어게임'(2021) 공개 전까지 역대 넷플릭스 시리즈 사상 최고 시청자 수로, 이 드라마는 미국 골든글로브와 에미상에서 작품상을 휩쓸었다. 바둑과 '서양의 바둑'인 체스가 세계 콘텐츠 시장을 잇달아 뒤흔들고 있는 것이다. 공희정 드라마 평론가는 "바둑과 체스는 똑같은 경기가 거의 나오지 않을 정도로 변화무쌍해 다양한 이야기를 펼칠 수 있다"며 "이 끝없는 전투에서 폭력 피해자('더 글로리')나 버려진 여성('퀸스 갬빗') 등 약자들이 싸움을 주도하며 사회적 악습과 편견을 하나둘씩 허물어트리는 게 시청자에게 카타르시스를 주는 것"이라고 인기 이유를 분석했다.
바둑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국민적 놀이'였다. 등산과 낚시 등을 제치고 레저 분야 인기 1위를 차지했고, 그 인구는 1,500만 명대로 추산됐다. 하지만, 1990년대 온라인 게임이 대중화되면서 바둑의 인기는 뚝 떨어졌다. "2016년까지만 해도 바둑을 둘 줄 아는 사람이 전체 인구의 약 20%(921만 명·한국갤럽 조사)에 달했지만, 요즘 바둑 동호회 인구는 10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는 게 바둑계에서 나오는 얘기다.
그렇게 시들어갔던 바둑은 '더 글로리'의 인기로 때아닌 특수를 맞고 있다. G마켓에 따르면 '더 글로리'가 공개된 지난달 30일부터 이달 17일까지 바둑 관련 용품 판매량이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134% 증가했다. 바둑 관련 도서 판매량도 67% 늘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엔 "바둑을 배우고 싶다"는 글이 잇따라 올라왔다. 드라마 '미생'(2014)과 '응답하라 1988'(2015) 이후 MZ세대를 중심으로 바둑이 새삼 인기 몰이를 하는 분위기다.
이 흐름은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가속화된 경제적 양극화에 거리두기로 인한 심리적 고립감까지 겹치면서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자존감을 개인의 승부(바둑)에 집중하며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반작용과 무관하지 않다. 바둑의 소환은 공정 신드롬의 연장선으로 읽히기도 한다. 김헌식 카이스트 미래세대 행복위원회 위원은 "불공정한 성과 평가에 분노하는 MZ세대가 다른 스포츠와 비교해도 우연적 요소뿐 아니라 외부 영향이 크게 작용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실력으로 하나하나 놓은 바둑알로 고스란히 결과를 얻는 그 방식에 주목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