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고향에선 ‘엑소더스(대탈출)’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트레거 알본 이쇼다 주한 마셜제도 대사는 고국을 떠올리며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태평양 한가운데 29개 환초(고리모양으로 배열된 산호초)로 이뤄진 섬나라 마셜제도는 지구온난화에 0.00001%의 책임밖에 없지만, 해수면이 상승하면 가장 먼저 사라질 국가 중 한 곳이다. 이미 많은 마셜인이 더 나은 삶을 찾아 나라를 등졌다. 마셜제도 정부 조사에 따르면 2021년 인구는 약 4만3,000명으로, 지난 10년 사이 20% 줄었다.
대다수는 미국으로 떠났다. 1985년까지 미국의 신탁통치를 받은 마셜제도 국민은 자유연합협정(COFA)에 따라 비자 없이도 미국에서 살고 취업할 수 있다. 지난달 전남 신안에서 열린 세계섬문화다양성포럼에서 만난 이쇼다 대사는 “아이들만큼은 언젠가 미국으로 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마셜제도의 미래를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마셜인들에게 삶의 터전인 ‘땅’이 가라앉는다는 건 존재의 근원이 사라진다는 의미다. 모계사회인 마셜제도에서 땅은 어머니에게서 딸로 대물림되고, 마셜인은 땅을 매개로 공동체 문화를 형성한다. 그래서 바닷물이 땅을 집어삼키고 눈앞에서 코코넛 나무가 쓰러지는 현실에 더 큰 무력감을 느낀다. “섬이 가라앉으면 나도 같이 가라앉겠다”는 사람도 많다.
일부 이웃 나라에선 수몰에 대비해 ‘국가 이전’ 계획이 논의되고 있다. 향후 국제법상 국가 지위 문제를 두고 논쟁이 벌어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그러나 이쇼다 대사는 “국가 주권보다 더 중요한 건 정체성 문제”라고 말했다. “미국 이주는 제도적으로 어렵지 않아요. 하지만 마셜인은 ‘섬 사람’입니다. 섬을 떠난 마셜인이 과연 마셜인일까요. 그런 의미에서 ‘정체성 붕괴’야말로 진짜 위기일지 몰라요.”
이쇼다 대사는 2015년 파리협정 도출을 위해 열린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 피터스버그 기후대화 등에 참여한 기후외교 전문가다. 2021년에는 솔로몬제도와 함께 국제해운업에 탄소세를 부과하는 방안을 마련해 국제해사기구에 제안했다. 전 세계 화물운송 90%를 담당하는 해운업의 연간 탄소배출량은 11억 톤으로, 탄소배출국 6위인 독일의 배출량(3%)과 맞먹는다. 이쇼다 대사는 “우리에겐 기후위기를 경고하고 대안을 준비해야 하는 책무가 있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7월 태평양도서국포럼(PIF)은 ‘2050 푸른태평양대륙전략’을 채택했다. 육지가 아닌 바다를 기반으로 ‘태평양대륙’이라는 개념을 도입해 섬이 사라져도 해양주권을 인정받겠다는 취지다. 14개 태평양 도서국은 영토 크기는 작지만 섬들이 넓게 분포돼 1,910만㎢에 달하는 광대한 배타적 경제수역(EEZ)을 보유했다. 전 세계 해양의 14%를 차지한다. “푸른태평양대륙은 쉽게 말해 유럽연합(EU) 같은 공동체예요. 우리의 목표는 생존 자체라는 점이 다르죠.”
마셜제도는 유엔과 미국 등 7개 지역에만 최고위급 외교관인 ‘특명전권대사’를 파견했는데 그중 한 곳이 한국이다. 현재 태평양 도서국 출신 주한 대사는 이쇼다 대사 한 명뿐이다. 그는 “한국과 마셜제도는 민주주의 신념을 공유한다”며 “비슷한 역사를 지닌 한국으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는다”고 했다.
마셜제도는 20세기 초 독일과 일본의 지배를 받았고, 제2차 세계대전의 주요 전장이었다. 종전 후에는 미군 기지와 핵실험지로 이용됐다. 미국이 1946~1958년 비키니 환초 등에서 실시한 67차례 핵실험 탓에 지금도 많은 주민들이 고통받고 있다. “전쟁 폐허를 딛고 눈부신 성장을 이룬 한국은 마셜제도의 롤모델입니다. 또한 마셜제도가 기후위기를 돌파하는 데 필요한 기술적 해결책을 가진 나라죠. 바로 제가 한국에 온 이유입니다.”
이쇼다 대사의 소망은 하나다. “마셜제도가 앞으로도 존재하는 것, 그래서 마셜제도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마셜제도에서 자라나는 것이요. 그것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