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전 세계적으로 학교 폭력의 심각성을 환기시킨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주인공 문동은의 담임교사 김종문은 짧게 등장하지만 가해 학생 무리만큼이나 강렬한 인상을 남긴 '빌런(악당)'이다. 배우 박윤희(56)가 연기한 김종문은 가해 학생 부모에게 매수돼 고가의 손목시계까지 풀고 피해자인 동은을 사정없이 때린다. 최근 서울 중구 한국일보 본사에서 만난 박윤희는 "큰 고민 없이 캐릭터를 만들었다"고 했다. 현실이 드라마보다 더 참혹함을 증명하듯 "학창 시절 김종문 같은 선생님을 너무 많이 봤다"고도 했다.
오히려 지금 하고 있는 연극의 배역을 만난 후 고민이 더 깊었다. 박윤희는 내달 19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공연되는 '넓은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내 마음은 춤춘다'에서 공교롭게도 학폭 피해 학생의 아버지인 조한수를 맡았다. 운영 중인 낡은 영화관 '레인보우 씨네마'의 폐관을 앞둔 역경 앞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주변을 돌보는 캐릭터다. "그저 소심한 아버지처럼 보이기도 하고 부성애와 책임감이 있는 인물인데, 고민 끝에 무엇보다 아이를 지켜 주지 못한 죄책감을 평생 안고 사는 아버지를 생각했어요. 죄책감을 숨기려 애써 온 힘이 고난 앞에서도 유쾌함을 지키는 힘으로 작용한 거죠."
'넓은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내 마음은 춤춘다'는 전작 '야끼니꾸 드래곤' 등으로 국내 관객에게도 친숙한 재일 한국인 극작가 정의신이 썼다. 배꼽을 뺄 만한 유쾌한 장면을 이어가다 어느샌가 눈물을 쏙 빼게 하는 정 작가 특유의 '단짠단짠' 전개가 돋보인다. 박윤희의 TV 출연작을 나열하고 '다 같은 사람인 줄 몰랐다'고 적은 온라인 팬 반응처럼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할 수 있는 그에게 맞춤옷 같은 작품이다.
박윤희는 최근 출연작만 봐도 '군검사 도베르만'의 갑질 군단장 홍무섭,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소덕동 이야기' 편의 판사,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백이진(남주혁) 아버지 백성학, '사랑의 이해' 안수영(문가영)의 아버지 안인재, '어느 날'의 김현수(김수현) 아버지 김정재 등으로 폭넓은 스펙트럼의 연기를 선보였다. 27일 공개된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쿠팡플레이 시리즈 '미끼'에도 출연한다.
매체 연기로는 최근에야 대중에 이름을 알렸지만 그의 연기 경력은 30년이 넘었다. 1989년 극단 실험극장에 입단해 이듬해 최민식이 주연한 '에쿠우스'의 말(馬) 역할로 데뷔했다. 극단 학전의 1994년 초연 뮤지컬 '지하철 1호선' 오디션에 합격해 '지하철 1호선'과 '모스키토', '개똥이' 등의 학전 작품에 출연했다. 그는 학전 동기인 황정민, 장현성 등이 톱스타가 된 데 대해 "함께 연기할 때부터 훌륭한 배우들이었고 나는 숫기가 없었다"며 웃었다.
박윤희는 생계가 막막해 한때 동료 몇 명과 연기학원을 차려 운영한 적도 있지만 배우가 아닌 생활인으로 끝날 것 같은 두려움에 사업을 접고 무대 연기에 몰두해 왔다. 2007년 연극 '심판'으로 동아연극상 '유인촌신인연기상'을 받으면서부터 대학로 대표 배우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부인 강명주도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소금군 후추양 간장변호사' 편에 판사로 등장한 배우다.
그는 매체 연기로 활동 영역을 넓히는 요즘도 여전히 "연극이 집처럼 편하게 느껴진다"면서도 "도전해 보고 싶은 좋은 드라마, 좋은 배역이 많아졌다"고 했다. OTT 시장이 커지면서 완성도 높은 콘텐츠가 늘어서다. 지난해 화제가 된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의 진양철 캐릭터 같은 강렬한 역할을 언젠가는 맡아보고 싶다.
"제가 다른 분야에서는 버티는 힘이 없는데 연기만큼은 어떻게든 이어가고 싶어서 포스터 붙이고 세차하는 아르바이트까지 해 가며 버텼어요. 순발력은 좀 부족해도 끈기 하나는 자신 있는데, 무게감 있는 '인생 연기'의 기회, 꼭 오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