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소·문] '헤어질 결심'은 오스카에 왜 만만하게 보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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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29 10:34

편집자주

‘수ㆍ소ㆍ문’은 ‘수상하고 소소한 문화 뒷 얘기’의 줄임 말로 우리가 외면하거나 놓치고 지나칠 수 있는 문화계 이야기들을 다룹니다.

“박찬욱 감독의 비평적으로 사랑 받는 로맨틱 누아르 ‘헤어질 결심’이 탈락한 것은 오늘 아침 가장 눈썹이 올라갈 일(놀랍다는 의미) 중 하나다.”

지난 24일 오전(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제95회 아카데미상 최종 후보 발표가 난 후 나온 현지 연예매체 버라이어티의 보도입니다. ‘헤어질 결심’이 국제장편영화상(옛 외국어 영화상) 후보 5편에 포함되지 않은 게 예상 밖이었다는 내용입니다. 버라이어티는 “국제장편영화상 후보 2편(‘클로즈’와 ‘EO’)은 헤어질 결심’처럼 보다 차분하고 지적인 작품들보다 오스카로 가기에 더 확실한, 가슴에 호소하는 어린이 중심 서술 영화”라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독창성이 두드러지고, 자세히 볼수록 숨은 재미를 찾아낼 수 있는 ‘헤어질 결심’이 상대적으로 불리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영화 자체가 지닌 한계만 있었을까요. ‘헤어질 결심’의 오스카 레이스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헤어질 결심’의 발목을 잡았을 만한 변수들을 ‘기생충’과 비교해 짚어보려 합니다.

①다시 확인한 ‘실전은 기세’

지난해 10월만 해도 ‘헤어질 결심’이 오스카 가는 길은 꽤 넓어 보였습니다. 버라이어티는 ‘헤어질 결심’을 작품상과 감독상, 각본상, 국제장편영화상, 남녀배우상 등 주요 부문에 최소 2개 이상 후보로 오를 만한 영화 37편 중 하나로 꼽았습니다. 다른 연예매체들도 비슷한 보도를 냈습니다. 특히 국제장편영화상 부문에선 선두주자로 분류됐습니다. 영화 완성도와 더불어 5월 칸영화제 감독상 수상이라는 후광효과, ‘올드보이’(2003)와 ‘아가씨’(2016) 등으로 쌓은 박 감독의 인지도 등이 작용했습니다. 미국에서 개봉(10월14일)하고 뉴욕영화제(9월 30일~10월16일)에 초청되는 등 언론의 주목을 받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연말이 다가올수록 ‘헤어질 결심’에 대한 주목도가 떨어졌습니다. 감독상과 각본상 후보로 거론하는 보도가 급격히 줄더니 국제장편영화상 유력 후보로만 언급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경쟁이든 ‘기세’가 중요합니다. 오스카 레이스는 더욱 그렇습니다. 화제를 만들어내고 영화인들의 주목을 이끌어야 내야 경쟁에서 유리합니다. 할리우드 스튜디오 등이 수백만 달러를 들이며 ‘오스카 캠페인’을 하는 이유입니다. 특히 아직 주류라 할 수 없는 한국 영화는 미국에서 여전히 선호도가 높은 유럽 영화과 달리 경쟁 과정에서 여러 성과를 확실히 보여줘야 수상 가능성을 키울 수 있습니다.

‘헤어질 결심’은 기세가 강하지 않았습니다. 극장 흥행 성적부터가 딱히 인상적이지 않았습니다. ‘헤어질 결심’은 ‘기생충’(2019년 10월11일 미국 개봉)처럼 극장 3곳에서만 우선 상영하는 제한 개봉 방식을 택했습니다. 입소문을 바탕으로 상영관을 조금씩 늘려가는 전략이었습니다.

미국 박스오피스 사이트 더 넘버스에 따르면 ‘헤어질 결심’의 첫 주 흥행 수치는 9만 달러. ‘기생충’(39만 달러)의 4분의 1가량입니다. ‘기생충’이 아카데미 최종 후보 발표 전 최대 상영관 수가 620개였던 반면 ‘헤어질 결심’은 169개였습니다. ‘기생충’이 후보 발표 전까지 2,535만 달러를 벌어들였으나 ‘헤어질 결심’은 214만 달러에 그쳤습니다. ‘헤어질 결심’의 흥행 수치는 나쁘지 않으나 화제를 불러일으킬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상복이 따르지 않기도 했습니다. 미국에는 지역별로 여러 평론가 단체가 있습니다. 이 단체들은 연말연시 지난 한 해를 정리하며 분야 별로 시상을 합니다. ‘헤어질 결심’은 플로리다영화평론가협회 감독상 각본상 촬영상 외국어 영화상, 보스턴영화평론가협회 편집상, 시카고영화평론가협회 촬영상 외국어 영화상을 받았습니다. 미국 연예산업 중심 로스앤젤레스와 뉴욕 평론가 단체에서 받은 상은 없습니다. ‘헤어질 결심’이 주류 영화인들 눈에 들지 못했음을 암시합니다. ‘기생충’은 로스앤젤레스평론가협회 작품상과 감독상, 남우조연상(송강호), 전미평론가협회 작품상과 각본상, 뉴욕평론가협회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했습니다.

골든글로브상에서 수상하지 못한 점이 특히 아쉬웠습니다. 골든글로브상 시상식(1월10일) 이틀 후인 12일부터 미국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 회원들을 대상으로 오스카 후보 선정 투표가 시작됐습니다. ‘헤어질 결심’이 골든글로브상 비영어 작품상(옛 외국어 영화상)을 받았으면 존재감을 환기시킬 수 있었을 겁니다.

②‘예술영화계 넷플릭스’가 최선?

‘헤어질 결심’의 미국 배급사는 무비(MUBI)입니다. 동영상온라인서비스(OTT)를 주업으로 하는 회사로 영국 런던에 본부를 두고 있습니다. 2007년 설립돼 고전영화와 최신 예술영화를 온라인으로 보여줘 왔습니다. ‘예술영화계 넷플릭스’라 할 수 있습니다. 무비는 2016년부터 극장 배급업에 뛰어들었고, 영화 제작까지 하고 있으나 뚜렷한 성과를 아직 보여주지는 못했습니다. 특히 오스카 관련해서 별다른 성취가 없는 회사입니다.

무비는 세계 예술영화 팬들이 애용하는 OTT이니 박찬욱 감독의 신작을 선보이기에 적합했을 듯합니다. ‘헤어질 결심’의 배급권을 얻기 위해 금액 등에서 호의적인 조건을 제시했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스카 레이스를 고려했다면 과연 무비가 최선의 선택이었을까 의문이 듭니다.

‘기생충’의 배급사 네온은 달랐습니다. 네온은 2017년 세워진 신생 회사이나 ‘기생충’을 배급하기 전 뚜렷한 성과들을 일궜습니다. ‘아이, 토냐’(2018)를 아카데미 3개 부문 후보에 올려 여우조연상(앨리슨 제니) 수상을 이끌어냈습니다. 스웨덴 영화 ‘경계선’(2018)을 분장상 후보에 올리기도 했습니다. 네온의 공동 설립자이자 최고경영자인 톰 퀸은 와인스틴 컴퍼니 출신입니다. 와인스틴 컴퍼니는 성폭력으로 영화계에서 퇴출된 하비 와인스틴이 동생과 함께 설립한 회사입니다. ‘미니 메이저’로 불리며 한때 아카데미 강자( '킹스 스피치'와 '아티스트' 작품상 수상)로 여겨졌던 곳입니다.

퀸은 와인스틴 컴퍼니에서 쌓은 노하우로 ‘기생충’의 오스카 레이스를 이끌었습니다. 결과는 4관왕(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장편영화상)이라는 위업 달성이었습니다. 올해도 활약이 눈에 띕니다. 네온이 배급한 ‘트라이앵글 오브 새드니스’는 오스카 3개 부문(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후보에 지명됐습니다. ‘트라이앵글 오브 새드니스’는 지난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최고상)을 수상한 영화입니다. 칸영화제 당시 ‘헤어질 결심’의 현지 평가가 더 높았다는 점이 새삼 떠오릅니다.

③한국에는 여전히 높은 문턱?

아시아계의 약진이 ‘헤어질 결심’에는 오히려 악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입니다. 작품상과 감독상 각본상 등 최다 11개 부문 후보에 오른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미국 영화이나 아시아 영화로 인식될 만합니다. 량쯔충(楊紫瓊)과 키 호이 콴, 스테파니 수, 제임스 홍 등 아시아계 배우가 대거 출연했고, 공동 연출자 중 한 명인 대니얼 콴 감독은 아시아계입니다. 량쯔충은 여우주연상, 키 호이 콴은 남우조연상, 스테파니 수는 여우조연상 후보에 각각 올랐습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뿐만 아닙니다. ‘더 웨일’로 여우조연상 후보가 된 홍차우는 베트남계입니다. 201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일본계 영국 작가 이시구로 가즈오는 ‘리빙’으로 각색상 후보에 지명됐습니다. 아시아계가 유난히 눈에 띄는 후보 선정 결과입니다. 2021년 중국계 클로이 자오 감독의 ‘노매드랜드’가 작품상과 감독상, 여우주연상을, ‘미나리’의 윤여정이 여우조연상을 각각 수상하고, 지난해 일본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가 국제장편영화상을 받은 점 또한 무시할 수 없습니다.

아카데미 부문별 후보는 AMPAS 각 분과 별 투표에 따라 선정됩니다. 배우 분과 소속 회원들은 배우상에 대한 투표를 하고, 감독 분과 회원들은 감독상 투표만 하는 식입니다. 국제장편영화상은 다릅니다. 선정위원회를 별도로 구성해 예비후보 15편을 먼저 뽑은 후 또 다른 선정위원회를 통해 최종 후보 5편을 고릅니다. 아시아계가 약진하고 있다는 분위기를 감지하고 전반적인 ‘지역별 안배’를 하자는 심리가 작용했을 수 있습니다. 우연일까요. 최종 후보 5편 중 4편(독일 영화 ‘서부 전선 이상 없다’, 벨기에 영화 ‘클로즈’, 폴란드 영화 ‘EO’, 아일랜드 영화 ‘조용한 소녀’)이 유럽 영화이고, 1편(아르헨티나 영화 ‘아르헨티나, 1985’)은 남미 영화입니다.

아카데미가 한국 영화를 여전히 홀대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합니다. 미국 온라인 연예매체 콜라이더는 지난 26일 ’‘헤어질 결심’ 탈락과 함께, 오스카 한국 영화를 또 무시하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지속적인 아카데미의 한국 영화 홀대를 지적했습니다. 오스카가 ‘기생충’을 통해 한국 영화에 문호를 연 듯하나 한국 영화 무시가 여전하다는 것입니다. 특히 “‘헤어질 결심’의 터무니없는 탈락으로 올해 (한국 영화 무시가) 더 눈에 띈다”며 “아카데미가 21세기 가장 창의적이고 흥미로운 영화적 움직임 중 하나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려 한 것 같다”고 신랄히 비판했습니다. 한국 영화는 1963년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시작으로 ‘헤어질 결심’까지 34번 국제장편영화상에 출품했습니다. ‘버닝’(2018)이 2019년 사상 처음 예비후보에 올랐고, ‘기생충’이 2020년 첫 수상했습니다. ‘헤어질 결심’은 예비후보에 오른 세 번째 한국 영화입니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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