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선 개정 않겠다는 비동의 간음, 찬반 논란 속 논의마저 사라지나

입력
2023.01.28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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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가부 '개정 검토'에서 '개정 계획 없음'으로 번복 후 논란 가열
법조계 "동의 여부 확인 어려워", 여성계 "상황 맥락 따지면 충분"
여성계 "국제적 추세" 주장엔 "해외 사례 면밀한 검토 선행돼야"
성적자기결정권 보호엔 한목소리…"논의 자체 사라져선 안 돼"

'비동의 간음죄'에 대한 찬반 논란이 재부상했다. 26일 여성가족부가 앞으로 5년간 추진할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을 발표하면서 법무부와 함께 비동의 간음죄 개정을 검토하겠다고 밝힌 뒤 불과 9시간 만에 "개정 계획이 없다"고 번복하면서다.

정치권에서는 과잉처벌이나 무고한 피해자를 양산할 수 있다며 반대 목소리가 나오고, 여성단체들은 "국제협약 권고대로 비동의 간음죄 개정을 이행하라"고 촉구한다. 주무부처인 여가부와 법무부가 한목소리로 "개정 계획이 없다"고 밝히면서 2016년부터 6년 여간 진행된 사회적 논의 자체가 사라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증거 확보 위해 녹음·서면 동의 받아야 하나

27일 여가부와 법무부 등에 따르면 비동의 간음죄는 피해자가 동의하지 않은 상태에서 성관계가 이뤄졌을 때 이를 성폭행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현행 강간죄는 폭행, 협박 등 물리력이 있어야 성립하는데, 이런 기준으로는 원치 않는 성관계를 맺는 피해자를 충분히 보호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가장 첨예한 쟁점은 동의 여부를 어떻게 판단하느냐이다. 백성문 변호사는 "처벌에 관한 법률은 규정 자체가 명확해야 하는데, '비동의'라는 의미를 정확하게 판단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렇다고 성관계 전 녹음이나 서면으로 동의의 증거를 남기는 것은 현실성이 떨어진다.

반면 여성계에선 사법부가 충분히 판단할 수 있는 문제라고 주장한다. 김민문정 한국여성단체연합 대표는 "지금도 성폭력 사건을 다룰 때 진술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상황적 맥락, 성관계 전후 정황 등을 따진다"며 "비동의 간음죄가 도입된다고 해서 모든 성관계 전에 동의 사실을 증거로 남겨야 한다는 것은 오해"라고 설명했다.

억울한 피해자 막기 위해 무고죄 강화할 수 있나

처벌 기준의 모호성은 형사법의 기본원칙에 어긋난다는 지적도 나온다. 서보학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형사법의 기본은 한 명의 진범을 풀어주는 한이 있더라도 10명의 억울한 피해자를 만들어선 안 된다는 것인데, 증거보다 진술과 정황에 치중해야 하는 비동의 간음죄가 도입되면 억울한 피해자가 늘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비동의 간음죄가 도입되기 전에 억울한 피해자를 보호할 수 있는 무고죄가 강화돼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서 교수는 "현재는 무고죄의 입건 자체가 쉽지 않은데, 무고죄 입건이 늘어나면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주장하기 어려워지는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여성계 "국제 추세" vs 법조계 "해외 사례 검토 선행돼야"

여성단체는 비동의 간음죄가 국제적 추세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는 이날 성명을 통해 "유엔 고문방지위원회는 2006년부터,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2011년부터 피해자의 동의 여부를 중심으로 강간을 정의하고, 배우자 강간을 범죄화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며 국제적 추세에 따라 비동의 간음죄를 도입하라고 주장했다. 영국은 2003년 동의 여부를 기준으로 강간죄 조항을 개정했고 독일은 2016년, 스웨덴은 2018년 비동의 간음죄를 신설했다.

법조계에서는 섣불리 도입하는 것보다 해외에서 시행 이후 발생한 현실적 문제들을 찬찬히 살펴보고 우리나라의 비동의 간음죄 피해자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현황을 파악하는 게 먼저라고 주장한다. 전날 법무부가 "해외 입법례에 대한 심층적 연구를 포함한 종합적 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낸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현황 파악이 선행돼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여성계에선 이미 원치 않는 성관계를 맺고 있는 피해자가 상당수 존재한다는 입장이다. 2018년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성인 강간 피해 상담 124건을 분석한 결과, 현행 강간죄에 해당하는 심각한 수준의 폭행·협박이 있었던 경우는 12.1%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가해자의 폭행이나 피해자의 저항이 없었거나 확인이 불가능한 경우였다.

전문가들 "논의 자체 금기시 하는 건 문제"

이처럼 비동의 간음죄 도입에 대해서는 다양한 찬반 대립이 존재하지만, 성적자기결정권이 침해돼선 안 된다는 입법 취지에 대해서는 법조계와 여성계가 한목소리를 냈다. 서 교수는 "현 정부의 지지세력이나 다가오는 총선 일정 등 정치적 고려와 상관없이 성적자기결정권을 보호하면서, 억울한 가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논의하는 과정은 충분히 이뤄져야 한다"며 "이런 점에서 여가부와 법무부가 '개정 계획 없음'으로 논의 자체를 덮으려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권수현 젠더정치연구소 대표는 "입법 논의 과정에서 꼭 법정에서 다뤄지는 얘기가 아니더라도 상호동의 하에 이뤄지는 바람직한 성관계 문화가 형성될 수 있고, 성교육도 개선될 수 있다"며 "현 정부 임기 내에 제대로 된 논의가 이뤄지기 힘들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김경준 기자
이유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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