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다) 미끄러져서 죽겠어." 차디 찬 철제 난간을 붙잡고 힘겹게 계단을 오르며 노인이 말했다. 내려다보니 그의 발밑이 온통 빙판이다. 마치 얼어붙은 폭포처럼 계단 전체가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보기만 해도 오싹한 '얼음 계단'은 깊은 골짜기도, 골목길 이면도로도 아닌 서울 한복판의 건물 내부에 있었다. 매서운 추위가 이어진 27일 서울 용산구 동자동의 한 쪽방촌. 건물에 들어서자 1층 벽면과 계단 경사면을 따라 주렁주렁 매달린 고드름이 눈에 띄었다. 말이 건물 내부지 온기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는 '냉골'이었다.
문제의 얼음 계단은 이 건물 2층과 3층 사이에 있다. 계단을 뒤덮은 얼음판 중 심한 곳은 족히 5㎝도 넘을 정도로 두껍게 얼어 있어 물이 꽤 오랜 시간 반복적으로 계단을 타고 흘러내린 것으로 보였다. 조심스럽게 얼음 계단을 올라가 보니 물이 새어 나온 화장실 바닥 또한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2023년 새해 온 나라가 '난방비 폭탄'으로 '멘붕'을 겪고 있다. 도시가스 등 열요금 인상에 때마침 몰아친 북극 한파까지 겹치며 취약 계층일수록 더 춥고 고통스러운 겨울을 보내야 한다. 서울 한복판에서 발견한 얼음 계단은 이 같은 '단열 빈곤층'의 현실을 그대로 담고 있다.
서울역쪽방상담소에 따르면 해당 건물에서 3년 전 배관 누수가 발생했고, 건물주는 이를 방치하고 있다. 이 곳에서 8년째 살고 있는 주민 A씨는 "온수가 안 나온지 3년이 넘었고, 식수나 생활용수로 쓸 찬물만 나온다"고말했다. 다용도실에서 물통에 식수를 채운 A씨는 슬리퍼를 끌며 방으로 돌아갔다. 누우면 발 끝이 벽에 닿을 정도의 조그만 방인데도 한기가 느껴졌다. 그는 "난방? 누울 자리에만 겨우 들어 오는 온돌이 전부"라며 힘겹게 자리에 누웠다.
이날 지인을 만나러 온 인근 쪽방촌 주민 B씨는 사흘 전 부서져 내린 벽면 사이로 자라난 고드름을 가리켰다. "(관리가) 엉망인데 (건물주는) 한 달에 딱 한 번 월세 받을 때만 나타난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여기 사는 주민 대부분이 기초생활수급자나 장애연금, 노령연금을 받는 분들이다. 거동이 불편한 분이 많은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정부와 지자체가 최근 난방비 폭탄으로 인한 에너지 취약계층의 어려움을 줄이기 위해 에너지 바우처 지원 및 가스요금 할인을 확대하는 등의 지원 대책을 서둘러 내놓았다. 하지만 이곳 쪽방촌 주민들에게 겨울 살이는 며칠째 녹지 않는 얼음 계단처럼 여전한 고통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