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째 벼르기만 하던 대상포진 예방주사를 얼결에 맞았다.
설 연휴를 앞두고 우편물 하나가 배달됐다. 작년에 조합원으로 가입한 내 고향 옥산농협에서 보낸 거였다. 봉투를 열어보니 설날 국거리용 소고기 교환권과 대상포진 예방접종 교환권이 들어있었다. 다만 소고기 교환은 면 소재지에 하나뿐인 하나로마트에서, 대상포진 예방주사 역시 면 소재지에 둥지를 틀고 20년 넘게 주민들의 건강을 책임져온 세 개 병원 중 한 곳에 가서 맞아야 한다는 단서가 붙어있었다. A4 용지에 인쇄한 두 장의 선물 교환권을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오며 가며 며칠을 보았다. 국거리용 소고기야 그렇다 쳐도 대상포진 예방접종이라니… 이렇게 야무진 아이템을 선물로 고른 사람을 수소문해서 밥이라도 사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꼭 10년 전 가을에 대상포진을 앓았다. 북 페스티벌이 열리는 홍대 앞 거리에서 주말 사흘간 책 1,000만 원어치를 팔아치우고 늴리리야, 춤을 추는데 불쑥 오한이 들었다. 쌍화탕 한 병이면 떨어질 몸살이겠거니 여겼으나 자고 일어나 보니 오른쪽 어깻죽지 부근에 생겼던 붉은 반점 위로 물집이 잡혀있었다. "걸렸군요, 걸렸어! 매출 천만 원 찍겠다고 바람 부는 거리에서 그 무리를 하더니 대상포진에 걸리셨어요." 뭐든 재수 없게 말하는 게 특기인 동료의 진단이 아니더라도 생전 처음 느끼는 신경 통증으로 미뤄 사태가 간단치 않다는 걸 나도 직감했다. 내과에서 처방받은 항바이러스제를 일주일 넘게 복용하자 증상은 잦아들었지만, 병약한 노인네의 전매특허라 여기던 병에 걸리고 말았다는 사실은 또래들보다 젊게 산다고 착각해온 내 자부심을 깊게 할퀴었다. 게다가 체력이 바닥을 칠 때마다 포진이 생겼던 자리에서 통증이 감지되는 건 또 다른 불안요소였다. 우리 시대 최고 건강 미남인 배우 마동석이 '50세 이상 대상포진 예방접종 필수!'를 외치는 광고를 볼 때마다 중요한 숙제를 미루고 있는 듯 개운치 않았던 건 그 때문이다. 그러니 농협에서 날아온 선물이 얼마나 각별했겠는가.
소중한 것은 사려 깊게 다뤄야 한다. 선물한 이의 마음을 헤아려 본격적인 농사철이 시작되기 전에 예방주사를 맞기로 했다. 명절 직전 고향에 간 김에 병원에 들렀다. 병원은 접종권을 들고 온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순서를 기다려 주사를 맞고는 면 소재지 마을 산책에 나섰다. 헤아려 보니 근 40년 만에 이 동네 깊숙한 곳으로 들어온 거였다. 많은 것이 달라지고 쇠락한 곳에서 길은 새로 나고 없어지고, 오래도록 이곳을 지켜온 이의 얼굴과 간간이 마주칠 때마다 나 혼자 반가워서 미소를 지었다. 길을 잃어봐야 백 걸음 안쪽이면 큰길가에 닿을 수 있는 작은 동네를 헤벌쭉거리며 누비다가 문득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고마운 이곳에 나는 어떤 답례를 해야 할까? 강고해지는 지역 불균형에 균열을 내보겠다며 벌써 몇 년째 '지방 재생, 마을 살리기'에 관한 책을 내면서도 정작 내 고향에는 손톱만큼도 보탠 게 없구나. 주사로 인해 뻐근해진 왼쪽 팔을 살살 주무르며 당장은 내게 주어진 작은 땅을 건강하고 정직하게 일구는 것부터 시작하자고 마음을 추스렸다.
명절을 쇠고 나니 북극 한파가 몰아친다. 지금 눈앞은 온통 얼음이지만, 소한, 대한 지나 다음 주면 입춘(2월 4일)이다. 힘차게 땅을 일궈야 할 봄이 발밑에 다가와 있다.